노사일체감이 어느나라보다 높기로 소문난 일본이지만 올해노사교섭은
예년보다도 더 수월할 것같다.

상상속에서나 존재할수 있을 것같은 "파업없는 노사협상"의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현재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임금교섭인 소위 춘투의 계절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교섭이 시작되기도 전에 철도 전력 전신전화등
대형노조들이 잇달아 스스로 파업권포기를 선언하고 있다.

노조들은 파업권포기선언을 하면서 하나같이 고베대지진에 따른
피해복구가 최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익보다는 공익 개인보다는 회사가 먼저라는 일본식 사고방식이
진하게 배어있다.

파업권포기선언붐에 불을 붙인 것은 전전통으로 불리는 NTT(일본전신전화공
사)노조.이노조의 가지야마위원장은 "전국에서 2만여명의 조합원들이
지진피해복구에 종사하고 있지만 빨라야 3월말에나 원상회복이 가능하다.

조직으로서는 이 최우선과제에 전력을 투구할수 밖에 없다"며 15일
전격적으로 파업권포기를 선언했다.

유력조합의 노조가 스트라이크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은 일본에서도
처음있는 일로 춘투의 향방을 가름하는 결정적 작용을 했다.

NTT의 선언 이틀만인 17일에는 철도노조들의 연합인 사철총련도
파업권을 포기키로 공식 결정했다.

이날 결정은 지진피해로 승객이 급감하고 있는 관서지역3사의 노조가
무리한 투쟁방식은 택할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계기가 됐다.

관동지역 4사의 노조도 독불장군이 되는 것은 있을 수없는 일이라고
판단,관서지역 3사의 결정에 가세함으로써 파업권포기가 사철전체로
확산됐다.

또다른 거대사철인 한신 한큐의 양노조는 회사가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을 감안 이미 중앙집단교섭에서마저 이탈한 상태다.

전력총련 역시 21일 파업권포기를 선언했다.

동경전력등이 가맹하고 있는 전력총련은 이날 중앙위원회에서 지진피해
복구에 매달리고 있는 관서전력등의 사정을 감안할 경우 파업권에
매달릴 상황은 아니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일본의 노조들은 지금까지 임금요구를 제출하면서 투표를 통해
파업권을 확보한후 파업위협을 무기로 경영자측과 교섭을 진행해왔다.

말하자면 파업권포기는 노조로서는 최대의 무기를 내던진 셈이다.

노동계관계자들은 이번의 파업포기선언이 한차례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노사협상을 평화적 협상으로 완전히 자리를
굳히게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투쟁인지 노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정도의
춘투였지만 이제는 그나마의 흉내내기투쟁도 보기가 어려워지게
됐다는 얘기다.

파업권포기뿐 아니라 노조들이 요구하고 있는 임금인상액도 소폭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어 협상이 난항을 겪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상태다.

철강노련소속의 신일본제철 NKK 스미토모금속 가와사키제철등 대기업
4개노조가 경영측에 제시한 임금인상요구액은 17년근속 35세의 표준근로자를
기준으로 2천엔에 불과하다.

정기승급분 3천5백엔을 합해도 총액5천5백엔에 그치고 있다.

지난해의 요구에 비해 7천엔이나 떨어진 수치다.

일시금(보너스)의 연간 요구액은 근속21년 39세노동자를 기준으로
1백38만엔. 이들 4개노조와 함께 행동해오던 고베제강노조는 대지진으로
회사가 7백억엔에 이르는 피해를 입은 점을 감안 다른 노조와의
공동협상안제출을 포기했다.

전전통의 경우도 이번 춘투에서 제시한 임금인상요구액은 17년근속자기준으
로 9천5백엔에 그치고 있다.

일본노조들의 근본생각은 "회사가 잘돼야 종업원도 잘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투철한 노사간 일심동체의식이 세계제일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기업의 밑거름이 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도쿄=이봉구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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