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라는 말이 구호적 성격을 띠면서 막연한 긴장감이 조성되더니
"세계화"라는 다소 생경하고 조금 알쏭달쏭한 말이 자주 거론되면서부터는
사람들의 표정이 완연히 초조해지고 있다.

"세계화"란 곧 무한경쟁을 뜻하는데 자기는 낙후돼있고 빨리 발돋움하지
않으면 영영 낙오될지 모른다는 느낌들을 갖게되는 모양이다.

보통사람들도 그런 기류를 실감하는데 세계를 상대로 경쟁해야하는
기업들이야 얼마나 큰 압박감을 느낄지 충분히 짐작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애교있는 항변은 머물 자리를 잃고
대신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2등은 필요없다"는 구호들이
열등감과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다.

대체 이 "세계화"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말이 우리에게 던져진 것은 재작년 APEC회의 직후인데 APEC란 속셈이야
어떻든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각 나라가 편협한 이기주의를 버리고 서로
돕고 양보하면서 잘살아보자는 취지로 모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GATT니 WTO니 APEC니 하는 무역회담이나 협정등은 세계적인
협력이나 공존의 개념보다 필사적인 경쟁과 외국에 대한 경계.견제의
개념만을 팽배시키고 있다.

그러니까 20세기 마지막 몇년은 "세계화"의 시기,즉 전세계를 상대로
한 전력투구의 경쟁시기로 확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까지 처럼 몸싸움으로 상대방을 KO시켜서는 안되고 세련되고
용의주도하게 상대방을 잠식하고 숨통을 죄어 스스로 두손을 바짝들게
해야하는 한층 더 비인간적인 경쟁의 시기로.

세계 모든 나라가 이런 치명적인 경쟁전략을 모든 분야에 걸쳐 써서
지구가 온통 고사한 시체로 뒤덮이게 된다면 결국 소수의 승자들에게
돌아갈 이득과 만족이 무엇일지는 전적으로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급한 걱정은 우리기업들이 세계와 한판승부를 벌이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경쟁에서 일등을 해야하고,국내경쟁에서는 방법이
고도로 세련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기업들은 이제까지 나라의 발전과 번영의 일등공신이었으면서도
항상 국민들의 불신과 지탄을 받아왔다.

해방이후 이제까지 여러모로 부족하고 불합리한 여건속에서 기업을
일으키고 경영하기 위해 상당한 무리수가 불가피했던 점은 대개의
국민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기업들은 상습적으로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경영수단을 써왔고 이제는 제반여건이 많이 개선되었는데도 그 생리는
별로 개선되지 않은 듯하다.

그동안 사회가 발전하고 국민의 의식도 향상되어 기업들도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어느정도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게끔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만 "세계화"바람이 불어서 기업들이 또다시 저돌적이고 살벌한
밀어붙이기식 방식으로 나가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 경우 국민과 기업사이 불신의 골이 더욱 깊어지게될 것이 두렵다.

세계화시대에 기업의 역할이 중차대한만큼 국민과 기업사이의 불신의
골이 깊어진다면 그것은 사회적 질병,국민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우리기업이 직접적 승부를 위한
기술개발과 서비스향상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장기적이고 진정한
승부의 토대인 인간관리 인적자원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주기를 촉구하고
싶다.

"세계화"라는 개념이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경제적 효용이 미약한
사람들을 2등국민내지 인간쓰레기로 치부되는 사태를 야기한다면
우리는 결국 세계화의 시험에서 패배하고 쓰러지고 말 것이다.

1등만 살아남지 않고 2등은 2등대로,10등은 10등대로,60등은 60등대로
각기 자기몫의 할일을 배당받고 능력껏 사회에 기여할수 있는 나라가
1등국가이다.

그런 나라에서 만든 물건은 고장이 없고 쓰면 쓸수록 마음에 들고
편리하고,그 나라에서 공급하는 물과 제공되는 음식은 먹는 사람의
힘과 지혜의 바탕이 되고,그 나라에서 지어진 집과 교량은 안심하고
살고 다닐수 있는 것일 터이다.

그런 나라의 국민과 상품은 세계 어느나라에서나 환영받으며 진출해
성공의 기쁨과 인간적 만족을 동시에 얻을수 있다.

세계화를 하고 안하고의 선택권은 우리에게 없을지 몰라도 세계화를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할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할수 있고 똑바로
선택해야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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