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후기의 실학자인 이용환은 "택이지"에서 사람이 살터를 잡는데
에는 첫째로 지세가 좋아야 하고 다음은 교역이 편해야하며 다음은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특히 지세에 있어서는 먼저 물길을 본뒤 들판의 행세, 산악의 모양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한 나라의 중심지가 되는 수도의 경우에는 그 여러가지 조건들 가운데
서도 물자교역이 편리한 곳이어야 한다는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도로의 건설을 생각할수 없었고 또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못했던 옛날만
하더라도 수도교통의 요충지에 수도가 위치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공통된
생각이었다.

조선왕조가 도읍으로 정한 한강변의 한양도 지금과는 달리 수도교통의
요충지였다.

서해안과 한강하류를 거쳐 호남 호서 황해 평안의 물자가, 한강상류인
남한강과 북한강을 거쳐 충북 강원의 물자가 각기 서울로 운송되었다.

"저 남쪽 바다 풍경이 고요하니/서강으로 배들이 모여드누나//검은
돛대 총총히 서서 구름 하늘 가리웠는데/쌓인 저 노적산과 가지런하네"
조선조 개국공신이었던 양촌 권근이 500여년전 한강하류의 포구였던
서강을 묘사한 것처럼 뚝섬 노량 용산 마포 양화진에도 팔도의 물산을
가득실은 배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뚜 섬에는 가원도의 숲, 용산과 노량진에는 목재, 마포에는 해산물고
소금이 내려졌다.

서강에는 조선조초기에 관선 인천군함의 초입을 관리하는 전함사를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병인양요때는 프랑스군함 3척이 마포<>중도앞까지 침입해 왔는가하면
병자수호조약체결이후에는 양화진과 용산이 강제로 개항되었다.

그런 와중에 2척의 증기선이 인천~마포사이를 운항하기도 했다.

그뒤 경인철도 부설로 한강의 선박운항은 활기를 잃어가게 되었다.

다만 마포로 오가는 새우젓배만이 그 명맥을 이어주고 있었을 분이다.

그러나 그것도 6,25와 더불어 한강과 임진강 합류지점이 휴전선이 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5년까지 서해안~서울사이에 화물선이 운항할수 있는 총연장 35 의
한강주운을 건설하겠다는 내용의 "서울시 세계화종합계획"은 한강의 옛
정치를 되찾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오래전부터 구상되어온 경인운하건설계획이기에 선거철마다 내놓아지는
선심공적<>발달의 되풀이가 아니기를 빌 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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