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딸아이가 여섯살때의 일이다.

딸아이와 함께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동네 슈퍼마켓에 가던
중이었다.

걸음걸이가 빠른 엄마를 쫓아오느라 종종걸음을 치던 딸아이가 문득
멈춰서더니 쪼그리고 앉아 신고 있던 운동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운동화끈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몇 발짝 앞장서 걸어가던 나는 딸아이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추어서서 아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손놀림이 익숙지 않던 딸애는 혼자서 운동화끈을 오랫동안
고쳐매는 것이 쉽지 않았던지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꾸무럭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나는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져 슈퍼마켓
쪽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으며 아이를 향해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딸아이는 얼른 쫓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왕"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디에 손이라도 찔렸나 싶어 놀라 달려가 봤더니 아이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채 엉엉 울고 있었다.

어딜 다치기라도 했느냐며 다그쳐 묻자 딸애는 계속해서 "엄마 미워"
라는 소리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일단 달래놓고보자 싶어 등을
토닥거리며 벗겨진 신발을 다시 신겨주고 있는데 아이가 훌쩍거리며
물었다.

"엄만 왜 그렇게 항상 바쁜 거야?"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장미빛 미래가 손짓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나 그렇게 허둥거리며 정신없이 살았다는 자각이 딸애의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날은 그렇게 딸아이를 독촉해댈 만큼 바쁜 일도 없었다.

설사 엄청나게 바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이가 마음 편하게 신발끈을
다시 고쳐맬 때까지는 느긋하게 기다려줬어야 했다.

그런데 기다려주기는커녕 오히려 재촉까지 하면서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도 바로 이런
조급함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같다.

지난해 전국민으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던 성수대교 붕괴,
열차사고 등의 대형참사도 따지고 보면 "빨리 빨리"를 강조한 부실공사의
후유증이 아니었던가.

뿐만 아니다.

지존파사건이나 택시강도 온보현사건 같은 끔찍한 범죄가 발생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그런 조급함과 결부된 한탕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우리의 조금함은 다소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차원을 훨씬
넘어서 거의 폭력적이다.

개개인들의 삶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에 충실하고 그 속에서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기보다는 소위 발전이라는 것을 핑계삼아 끊임없이 또다른 욕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미친듯이 뛰고 달리면서 말이다.

어느날 느닷없이 죽어넘어지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사십대 중년남자들의 불안감이나 체크세대라 불리며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는 삼십대들의 위기의식도 결국은 우리의 그런
"여유없음"에서 비롯된 결과에 다름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매일매일 유보되는 우리의 행복은 언젠가 한꺼번에
뭉뚱그려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유보되고 또 유보될 뿐이다.

그렇다면 "왜 사는가" 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어쩌면 다소
진부하고 구태의연할 수도 있는 이 질문이 지금 우리에게는 새삼스레
유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급함이라는 맹목적 치달음으로부터 잠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과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