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 말엽에 히사미쓰는 공무합체를 주장했었다.

막부를 없앨 것이 아니라, 타협을 해서 황실과 권력을 공유해 나가는,
말하자면 합작형태의 새로운 체제를 지향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이고와 오쿠보가 주동이 되어 기어이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고하더니, 마침내는 번을 없애는 조치까지 단행했으니, 그로서는 그 둘이
원수나 다름이 없었다.

자기가 키워준 가신이 자기로부터 사쓰마번이라는 영지를 빼앗아버린
격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두사람의 얘기만 나오면 절로 증오가 솟구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권력이 좋다고는 하지만, 어린 시절엔 형제처럼 지냈고, 대가리가
굵어져서는 존황양인가 뭔가를 외치며 함께 뛰어다니더니, 결국 나중에는
이런 내전까지 벌이며 서로 다투다니, 인간말자들이지 뭐요. 우리 사쓰마
에서 그런 꼴불견이 생기다니, 큰 수치요, 수치"

히사미쓰가 두사람의 개인적인 관계를 들먹이며 비난하자, 야나기하라는
자기도 동감이라는 듯이 히죽이 웃어버렸다.

히사미쓰를 통한 사이고의 단죄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야나기하라는 또한가지의 임무를 띠고 가고시마에 왔는데, 그것은 지사인
오야마를 도쿄로 구인하는 일이었다.

중앙정부의 임명으로 가고시마현의 지사가 된 오야마는 겉으로는 정부의
지시에 따르는 척 하면서 실상은 사이고를 위해서 현청 업무를 수행하다시피
했으니, 그 죄를 태정관에서 묵과할 턱이 만무했다.

더구나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거느리고 도쿄를 향해 떠나게
되자, 보고문이라 하여 마치 중앙정부에 항복을 하라는 투의 글을 자기
이름을 맨 앞에 서명하여 보내기까지 했으니, 미움을 사도 단단히 샀던
것이다.

수병들을 동원하여 현청을 포위한 다음 야나기하라는 몇몇 장교와 사병을
앞세우고 지사실로 쳐들어갔다.

"손들어!"

"이 반역자야!"

"이놈아, 네가 지사냐? 지사가 반란군의 편을 들다니, 어서 포승을
받아라!"

총검을 들이대며 냅다 고함들을 지르는 바람에 놀란 오야마는 순순히 두
손을 들었다.

뒤따라 들어온 야나기하라가 통고를 하듯 말했다.

"오야마 지사 들어라. 오늘부로 지사직에서 파면이다. 그리고 도쿄로
구인해 간다. 알겠느냐?"

오야마는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있었다.

포승으로 묶인 그는 그 길로 곧바로 군함으로 끌려가 갇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