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은 존 내쉬등 게임이론에 공헌한 학자들에게 돌아갔다.

난데없이 "웬 게임이론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게임이론이야말로 경제
현상을 동태적으로 파악할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접근틀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 탁월한 유용성은 정부와 민간(기업)이라는 두 집단의 관계분석에
적용해보면 쉽게 알수 있다.

정부는 세금 통화 산업진출입등 여러가지 형태의 정책(게임 용어로는
전략)을 내놓는다.

이경우 기업들은 정부의 정책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방법을 찾아내
대응할 것이다.

만약 기업의 대응방식이 정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 경우 정부는
새로운 대응책 또는 개선책(전략)을 내놓지 않을수 없게 된다.

정부가 새로운 전략을 채택하면 기업들은 또다른 형태의 대응방식을 찾게
된다.

경제는 바로 이와같은 정부와 민간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략대응관계에
의해 이어져 간다.

크게 보아 정부와 기업의 관계는 바둑판에 마주 앉은 두 사람으로 해석될수
있고 이런 게임상황적 분석은 여러가지 의미있는 시사를 던져 줄수 있다.

정부는 다름아닌 장중단기적 대응전략을 끊임없이 내놓는 전략의 주체라고
봐도 좋다.

겨울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공장에서 쓸 물마저 모자란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기업인들의 고충은 물가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대로 가다가는 물가뭄과 함께 돈가뭄의 이중고에 시달리지 않겠느냐는
것이 이들의 걱정이다.

돈 저수지라고 할수 있는 증시에 변화의 바람이 불지 않는한 올해 "돈
저수지"도 "물 저수지"처럼 말라버릴지 모른다는 우려가 일고 있다.

증시가 기업의 유일한 자금공급원은 아니다.

그러나 기업공개 유상증자 전환사채발행(CB)등을 준비해 놓고 있던 기업들
은 기업재무계획이 예상대로 풀리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물론 시중에 돈은 많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증시에 머물러 있으려는 "적극성을 띤 돈"이 많지
않다는데 있다.

부동산에 대한 계속적인 철퇴가 이어지고 금융소득종합과세실시가 임박
했다는 환경적 요인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증시로 유입되지 않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정부가 시중자금을 조이는데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원인은 "올해안에 공급될 물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투자자들의 인식이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면 주식값이 떨어지는 것은 뻔한 일.주가하락을
예견하면서도 증시에 주저 앉아 있을 사람은 없다.

"돈저수지" 수위가 내려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게임상황적 용어를 빌리면 투자자들의 전략은 이미 큰 선회를 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이런 상황인식에 공감한다면 투자자들의 전략수정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수정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응전략수정은 미온적이라는 것이 일반인들의
평가다.

"자율화"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게임의 주체로서의 당연한 역할인 "대응돌"
놓기를 주저하고 있다.

"증시대책을 세우라"는 요구와 "자율성을 보장하라"는 슬로건은 분명
모순관계에 있다.

그렇다고해서 정부가 "자율화"라는 굴레속에 안주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율화는 이분법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대응수를 포기한다면 그것으로 바둑은 끝나게 된다.

상대방이 돌을 놓지 않는데 마냥 기다리고 앉아 있을 사람은 없다.

증시문제의 핵심은 통화와 물량문제에 모아진다.

물가에 묶여 통화문제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처지가 아니라면 문제를 푸는
열쇠는 물량조정에 귀착된다.

물량조정에 대한 획기적 개선안이 나오지 않는한 투자자들의 심리가 회복
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돈 저수지"가뭄의 진행은 기업의 재무정책에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되고
이는 또다른 증시폭락의 악순환으로 이어질수 있다.

찰스 핸디는 "비이성시대(The Age of Unreason)"에서 인류진보의 특성을
재미있게 묘사한 조지 버나드 쇼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인류의 진보사는 비이성적인 사람에게 지배돼 왔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사람은 스스로를 주변의 변화에 적응해 나가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은 세계를
자기에게 적응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상황에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다.

버나드 쇼가 지적한 이성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정부가 내면적으로는 시시콜콜한 문제에까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정부의 자율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율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자기 귀만 막으면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종을 훔치는 "엄이도령식 자율"은 분명 어리석은 것이다.

이는 연속적인 게임의 전개를 부정하는 직무유기에 해당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