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체제 붕괴 이후 세계가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돌아가는데 오로지
북한땅만은 안개속에 묻혀 있다.

최고 통치자의 자리란 한순간도 공백으로 두는 예가 고금에 없는데 북한
주석자리는 반년이 가깝도록 비어 있다.

그러니 주석의 신년사가 나올래야 나올수도 없다.

지난 1일 평양방송은 여느해 신년사 방송시간에 3개신문 공동사설을 낭독
했다.

그 희한한 형식이나 사설의 내용을 보아도 북한의 권력관계가 진통을
앓고 있다는 의구가 높아간다.

먼 장래가 아니라 올 한해만을 놓고도 북한의 앞날에는 점치기 어려운
많은 변수들이 잠복해 있다.

또한 그같은 불연속적 변화는 누구보다도 남한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

형식은 어쨌든 공동사설의 내용으로 미루어 우선 대남 노선에서는 최근
계속 보여온 경직된 자세를 쉽게 누그러뜨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남한의 현 정권을 극한적 어휘를 구사하며 비난한 한가지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것은 아니다.

저들의 체질상 말과 행동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불구대천으로 증오의 대상을 삼던 미국을 대화와 수교의 대상으로 바꾸어야
할 그들로서 어떤 대속물을 내놓지 않고는 인민을 납득시킬수 없는 처지다.

그 대속물이 적어도 당분간은 다름아닌 한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북한 역시 개방의 물결을 혼자 역류할수는
없다.

오히려 대남비방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면에는 개방을 하되 체제의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방의 선을 분명히 긋겠다는 전략이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최근 전해지는 일부 북한동향이 그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나진.선봉 개방예정 지구에서 성분을 따져 주민을 교체하고 그 지구의
안쪽으로 휴전선에 맞먹는 차단시설 공사를 진행하며 방북한 남쪽 기업인들
의 평양방문을 금지한다는 등의 보도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대목은 북의 당국자가 협력대상으로 초청해간
남한 기업인들에게 경제사업은 하되 조용하게 진행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점이다.

자유언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저들은 당장에라도 남북경협이 실현될듯
떠드는 남쪽 언론들의 보도논평을 정부의 의도적 공작으로 오해한다고 한다.

사실 우리 기업들의 북한진출이 기업자체로나 국가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임
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럴수록 서둘러선 오히려 일을 망치고 지나치게 앞을 다투어선
기업까지 망친다.

누차 지적돼 왔지만 중국과 대만간에서 배워야 한다.

말없이 교역부터 늘려가면 다음 단계의 협력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