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은 19일오전 전경련회관에서 마이클 노박박사
초청 "자유기업 심포지엄"을 열었다.

김진현 한국경제신문회장 사회로 진행된 이날 심포지엄에는 강경식 민자당
의원, 고범서 한림대교수, 구석모 한국경제연구원부원장, 권녕훈 한양대
교수, 김덕중 서강대교수, 김동기 고려대교수, 김세열 한남대교수, 박우희
서울대교수, 엄영석 외국어대교수, 한홍순 외국어대교수등이 토론에 참가
했다.

노박박사의 "가난한 이늘과 민주주의를 위한 자본주의"라는 주제발표요지를
간추려 소개한다.
< 편 집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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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에 존재해온 어떤 제도보다 자본주의를 더 좋아하는데는 두가지
강력한 논거가 있다.

그 첫째는 자본주의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도 가난한 이들이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는데 더 나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둘째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성공하는데 하나의 필요조건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전에 다른 제도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본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은 단지 두가지만이
있다.

그 하나는 북한 쿠바 베트남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그밖의 몇몇나라의
사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대부분, 그리고
아시아의 큰 지억에서 볼수 있는 전통적인 제3세계 정부통제 경제이다.

그렇다면 나는 강력한 증거에 의해 입증될수 있는 두개의 명제를 여러분들
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제3세계 경제나 사회주의 경제들보다 자본주의가 절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을 빈곤의 감옥에서 탈출하게 하고, 기회를 찾아내고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경제적 시도에 대한 충분한 영역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중산층이나 그 이상으로 올라서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확실한 증거를 밝힐수 있는 방법은 거의 어느 자본주의 나라에서
누구에게 물어보든지 그들의 가족역사를 더듬어볼때 가난했던 사람들을
찾을려면 몇세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절대다수의 우리들은 우리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세대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1900년에는 미국의 매우 많은 사람들이 가까스로 생계를 우지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오늘날 우리 가족들의 대부분은 풍요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1848년에 칼 막스는 이 새로운 제도의 신선함과 위대함에 감탄하였다.

"부르조아는 겨우 100년도 안되는 기간동안에 지나간 모든 세대의 생산을
모두 합친것 보다도 더 크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창조해 냈다"

1848년에 그 절반도 보지 못했다.

두번째로 내세울 중요한 논점은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증적인 명제로서 우리 눈앞에 이미 나타나고 있는 경우들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나라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적이긴 하지만 민주적이 아니다.

한 나라가 자본주의 나라라는 사실은 그 나라가 민주적으로 되기에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이스 포르투갈 스페인(피노셰(Pinochet)이후의
칠레 남한과 그밖의 나라들의 경우를 볼때 일단 자본주의 체제가 충분히
크고 성공적인 중산층을 형성하게 되면 민주주의로 옮겨갈 압력이 매우
강해진다.

그 이유는 성공적인 기업가들이 장성들이나 공산당 간부들 보다는 똑똑하고
훨씬 유능하다는 것을 급속히 깨닫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고대시대로부터 잘 알려져 왔듯이 중산층은 공화국 정신의 바탕이다.

자유로운 경제가 자유로운 정치로 이행해 가듯이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로
이행해 간다.

두 경우 모두 법에 의한 지배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자본주의도 민주주의도 정부 권한의 축소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논리로 볼때 기업가 정신이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특히 남쪽지방
에서 자라날수록, 그리고 중산층이 자신감을 갖고 독립하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앞으로 민주적인 제도를 선호하는 아주 강한 물결이 중국의 현정부
구조에서도 느껴질수 있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할수 있다.

자유경제체제는 중국이 자유정치체제로 이행하는 추진력을 줄 것이다.

세계를 통틀어 사람들은 만약 민주주의가 그들의 경제여건을 개선해 주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를 사랑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단지 매2년마다 투표할 기회를 제공하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경제여건이 나아지는 것을 보기 원한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유토피아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장래 3~4년동안 그들의 가족들이 확실하게 경제적으로
나아질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기 원한다.

그들은 적어도 어떤 작은 개선을 원하며 그러한 개선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현실성있는 희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최소한 동태적인 경제에서 민주주의의 성공을
가져오는데 없어서는 안될 심리적인 메카니즘이다.

자본주의는 그 약속의 하나로 민주주의가 유지된다는 공동선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런던에서 그리고 토마스 제퍼슨은 파리에서 왜 공화정이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찾기위해 도서관을 뒤졌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부러움(envy)이 질투보다도 더 심한 가장 파괴적인
사회적인 정열이라는 것이다.

이 부러움은 적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며 통상적으로 악마라고 인식되고
있다.

부러움은 그 이름을 그대로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다.

부러움은 그것이 뒤로 숨을수 있는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찾아내며,
무색무취의 독가스처럼 활동한다.

과거 역대 공화정에서 이 부러움을 계층과 계층을, 도시의 한 지역을 다른
지역에 대해, 명문가가 다른 명문가에 대해 서로 대항하게 했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의 미국사람들은 분열에 대해 저항하였으며, 이
부러움을 중화시킬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 부러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공화정을 성공할수 없다고 그들은 결론
지었다.

이러한 과업은 완수를 위해, 그들은 공화국이 종교적인(성직자) 계층이나
귀족과 군인계층(이들의 "명예"에 대한 관심이 너무 많은 적대감이나 정복
욕을 일으켰다)에 기초하지 않고, 훨씬 초라하고 전통적으로 심하게 괄세를
받았던 계층에 기초하도록 했다.

그들은 그들이 소위 "상업적인 공화국"이라고 불렀던 것을 선택했다.

그들은 그들의 사회적 기초로 철학자들,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시인들이
비천하고 무시해도 된다고 공통적으로 생각했던 이 계층, 그리고 이들의
활동을 선택했을까.

왜 그들은 멸시받는 상업을 택했을까.

왜 비천하고 노예들이나 하는 장사꾼의 산업을 택했을까.

왜 도구적인 것들을, 귀족들이 무시당하는 사람들보다 낫듯이 항상 최상의
것이어야만 하는 인물예술과 같은 "그 자체로 모든게 완벽한 것들"을
택하지 않고 도구적인 것들을 택했을까.

그들은 다음 두가지 이유로 낮아 보이는 것들을 택했다.

첫째 공화국의 모든 사람들이, 특히 능력있는 가난한 이들이, 매년 그들의
물질적 여건이 실제로 나아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오늘 그들의
상태를 내일 그들이 성취하기를 기대하는 상태와 비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그들 이웃과 비교하지 않게될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의 개인적 목표가 그들 이웃들의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능력에 맞추어 그들 자신의 목표를 찾고, 그들 스스로 만족
하려고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성장하는 경제-사회적 신분상승이 일어나고, 기회가 확대되고,
개인적인 성취감을 추구하는 - 그 상승하는 힘에 의해 유지 발전된다.

두번째 이유로,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이 나라의 경제적 기초로 상업과
산업을 선택했던 것은, 공화정기구에 두번째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다수에
의한 획일적 지배(the tyranny of a majority)를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산업과 산업이 그들의 구조와 목표면에서 서로 다르며, 기업과 기업도
서로 다르다.

그러한 방식에 의해 상업과 산업은 하나의 공통적인 경제적 다수를 상당히
서로 다르게 했던 것이다.

요약한다면, 상업과 산업은 공화정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의 성공을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이다.

왜냐하면 상업과 산업은 경제적 기회를 개방하고 경제적 성장을 실현하여
부러움을 이겨냈으며, 그리고 경제적 관심을 많은 서로 다른 촛점들로
분리시킴으로써 다수에 의한 획일적 지배를 극복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초점에 대한 결론을 짓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무엇인가.

우리가 사용하는 사전들의 대부분은 칼 맑스의 정의(시장교환,사유재산권,
그리고 사적 축적 또는 이윤으로 이루어진 체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맑스가 자본주의에 대해 적대감을 가졌던 것을 아는 우리가, 왜
그의 정의를, 특히 그것도 실증적 증거에 의해 배치되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자본주의는 적절한 정치 제도와 협조적인 도덕.문화 체제에 의존하는 경제
제도로써, 인간의 경제적 창조성을 지원하는 많은 다양한 사회적 기구를
창출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정신을, 즉 caput(라틴어로 머리), 재치 발명 발견 사업과
같은 인간정신을 지향하는 체제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경제적 시도를 하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수 없는 권리의
제도적 지원을 가져왔다.

이러한 제도의 핵심은 인간이 책임을 지는 전 분야에 걸쳐 인간 개개인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질서로서 법지배는 경제적 질서에 선행한다.

도덕적.문화적 질서는 이 두 질서에 우선한다.

경제학은 현존하는 것이 전부이고 지향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 아니다.

경제학은 하나의 도구적인 예술이다.

자본주의는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에게 최상의 희망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잉태시키는 필요조건이다.

그것은 비천한 것이지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실패한다면 폴란드로 부터 유크레인으로 거대한 평원을
따라 넓게 펼쳐져 있는 중부유럽에서 더 나아가 북부아시아로 뻗어져 있는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실패한다면 21세기의 역사는 20세기 보다 더 많은
피로 물들지도 모른다.

자유는 보장될 수 없다.

우리의 건국자들이 일러준대로 그 댓가는 지속적으로 정신 바짝 차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란 어떤 면에서는 가장 덜 안정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인간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근본적인 사상에 강하게 매달려 있고, 우리의 의지가
우리가 꼭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아직 자유를 누릴 기회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활약할 수 있는 기회는 있다.

기회만 달라.

보장은 필요없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