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의 제왕이면서 그릇도 크고 덕을 진 사이고였지만,그 역시 사람이어서
오쿠보에 대한 증오의 감정은 도무지 깨끗이 털어낼 수가 없어서 때때로
혼자서 만취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날도 멀리 서녘 하늘의 노을을 바라보며 울적한 기분이 되어 주기에
젖어 있는데,오야마 지사가 찾아왔다.

"웬 술을 혼자서 이렇게."

벌써 취기가 꽤 높다는 것을 대뜸 알고 오야마는 걱정스레 중얼거리면서
사이고의 술상 앞에 앉았다.

"잘 왔소. 자, 같이 한잔 하자구요"

"사이고 도노, 벌써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많이 취하기는. 조금 취했을 뿐이오. 자, 이잔을 받아요"

사이고는 잔에 남은 술을 훌쩍 마저 마시고는 불쑥 오야마 앞으로
내밀었다.

그잔을 조금씩 서너 번 나누어 다 비울 때까지 오야마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가 사이고를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냥 한가롭게 놀러오는 일은 명절날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없었다.

그런데 아무 얘기가 없으니 사이고는 답답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도 무슨 소식이 있을 것 같은데, 왜 아무 말이 없소?" 그러자
오야마는 마지못하는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도령이 내렸습니다" "뭐요? 폐도령?" 사이고는 취기에 번들거리는
부리부리한 두 눈을 더욱 휘둥그렇게 떴다.

가뜩이나 취한 사이고가 너무 놀랄까 싶어서 오야마는 말을 꺼내는 걸
주저했던 것이다.

폐도령은 사족들이 칼을 차고 다녀서는 안된다는 조치였다.

이미 몇해 전에 산발탈도령이 내려져 있었다. 존마게(상투)를 자르고,
사족들도 칼을 휴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치였다.

그러나 사족들의 칼 차고 다니는 풍습은 좀처럼 바뀌질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육군경인 야마가다아리도모의 건의도 있고 하여 태정관
에서 폐도령을 포고한 것이었다.

앞으로는 대예복을 착용한 경우와 군인,경찰 외는 칼을 차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던 것이다.

기리스데고멘,혹은 부레이우치라 하여 말 안 듣는 백성은 목을 날려도
상관없다는 특권까지 부여했던 사족들로부터 이제는 그 칼까지 빼앗아
버리는 조치인 셈이었다.

"음- 고이얀 것들 같으니라구" 사이고는 침통한 목소리로 신음을 하듯
내뱉었다. 그리고 냅다 안쪽으로 향해 소리를 질렀다.

"술 더 가지고 오라구. 술-"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