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말 서울 창동에는 낯선 창고형 매장 하나가 생겼다.

소매상들이 현금으로 필요한 물건을 박스단위로 사가는 곳이다.

선경유통이 세운 멤버쉽서비스센터(MSC). 신세계백화점이 올해 양평동에
개점한 회원제 창고형매장(MWC)인 프라이스클럽과 비슷한 현금무배달의
캐쉬앤캐리(Cash & Carry)방식이었다.

다른게 있다면 소매상이나 음식점주 같은 법인회원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창동매장은 불과 1년여만에 문을 닫고 말아야했다.

"무자료상품이 판을 친다지만 그래도 30%는 우리 물건을 사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달매출이 3천만-6천만원인 수퍼마켓에서 사가는 물량이 채
3백만원도 안됐다.

그것도 무자료시장에서는 사기 힘든 인기제품들만 곶감빼먹듯 골라갔다"
선경유통 관계자들의 회고다.

연간매출이 3천6백만원을 넘으면 과세특례혜택에서 제외되기에 소매상
들이 세금계산서를 발부하는 창동매장을 꺼린 것이다.

일반 회원점에의 공급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선경유통은 11개에 이르던물류센터를 3개로 대폭 줄이며 사업방향을
대폭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현재 선경유통은 1차식품전문점인 S마트 체인사업에 온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도매업에 대한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자료상품의 공세를 피할 수 있는 1차식품에서 경쟁력과 매출기반을
확보함으로써 도매업에의 화려한 복귀를 꿈꾸고 있다.

진로그룹이 지난88년 서울 서초동에 세웠던 진로도매센터도 창동센터와
비슷한 케이스. 그룹관계자는 "진로소주라는 막강한 상품에 대한 환상이
무자료시장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금융실명제로 무자료시장이 위축되고 할인점이 제조업체의 납품거부
문제를 야기시키는등 도매업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그동안 낸
수업료를 돌려받을때가 온 것이다"

지난날 실패를 거울삼아 제대로 도매업을 해보겠다는 관계자의 의지가
담겨있다.

장진호그룹회장이 최근 베스토아 1호점 개점식에 참석, "책방 약국
레코드점등 업종간의 경계가 무너져가고 유통업이 복합화될수록 도매업
의 필요성이 커진다"는 소신을 밝힌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선경과 진로의 경험은 국내 도매업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부가가치세제가 만들어낸 무자료시장과 세금계산서 기피라는 잘못된
관행이 첨단 시스템의 위력을 여지없이 뭉개버린 것이다.

백화점아니면 재래시장식으로 양분된 국내 유통업의 양극화 현상도
도매업이설 땅을 좁게 만들고 있다.

일본 유통산업연구소 고야마 수조(소산주삼)소장은 "도매 대 소매의
매출비중이 일본은 3대1 미국은 2대1인데 반해 한국은 0.9대1로
도매상의 매출이 오히려 소매상보다 적은 기형구조를 갖고있다"며
"도매업의 성장이 유통업 발전의 기본"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아직도 90년대 초반의 난맥상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96년 유통시장 개방을 앞두고 정부가 도매업의 육성을 너무 방관하고
있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국내 업체끼리도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게됐다.

바로 이점에서 "소매상들은 주체가 누구이던 누가 싼 값에 양질의
제품을공급하느냐로 파트너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수퍼마켓협동조합
허종기전무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영훈기자>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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