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모 < 고등기술연구원장 >


북한의 핵문제가 표면화되면서 원자력에 관한 국민의 관심도가 높아졌고
많은 정책관련자들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핵무기 비확산에 직접.간접
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이미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분야에서는 세계 10위권에 진입하였고,
개발도상국가중에는 가장 활발한 원자력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우리나라
로서는 최근의 높은 국민적 관심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할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때에 정부가 원자력법을 개정하여 시대에 걸맞는 원자력 행정체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나라의 원자력 행정체계가 다원화되어 있고, 최고 의사
결정기구로 명분을 갖고 있는 원자력위원회가 고유의 기능을 발휘할수
없도록 구성 운영되어 왔다는 것이다.

현재의 원자력위원회는 경제기획원장과, 상공자원부장관, 과기처장관,
한전사장등 4명의 당연직위원과 3명의 비상근위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무국
역할은 경제기획원과 과학기술처의 관련부서들이 담당하도록 되어있다.

바쁜 당연직위원들이 전문적 지식을 요하는 원자력의 현안과제를 심도있게
다루기는 어려웠고, 소속 기관의 이해관계가 얽혀져 있어서 객관성을 유지
하기도 어려웠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일년에 한 두어번 모이는 원자력위원회에서 복잡한 분석과 판단을
요하는 원자력사업을 단시간에 논의할수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많은 경우 하급기관일 준비한 결론을 위원회의 이름으로
공식화시키는 것으로 그 역할이 끝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도 반박하기가
어려운 실정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원자력 종합정책은 최근에 와서야 골격을 갖추어 가고
있고, 앞으로 결정해야 할 중요한 사안들도 무수히 남아 있다.

북핵문제의 완전한 타결과 핵폐기물의 철저한 처분 관리,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원자력 안전문화의 정착등을 위해서는 충분한 전문적 지식과
장기적 안목에서의 슬기로운 정책 결정이 내려져야 한다.

하나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려면 기획에서 준공운전까지 최소한 10년의
시간이 필요하고, 막대한 자금과 고도의 안전기술이 적용되어야 한다.

또한 핵폐기물 처분관리 시설과 같은 필요 불가결한 시설도 마련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20년전에 원자력발전사업을 기획하였을때 전문가적인 식견이
있었다면 보다 효율적인 기술자립에서부터 핵폐기물 처분 관리시설까지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원자력 사업을 시행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불행히도 원자력사업의 전체과정을 이해할수 없었던
비전문가들의 결정에 따를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현재의 원자력정책은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협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진행된 북한회담에서도 우리의 의견일 반영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북한과 미국이 결정한 것을 수용할수 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는,
우리가 전문성과 장기 비전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임기응변적인 대응전략
에만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원자력 관련정책 과제들은 지금 대중국외교, 아태경제협력체(APEC)지역
외교나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서돌 최우선읠 중요성을 갖고 있기에 이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중요한 사안중의 하나는 북한의 한국 표준설계 경수로를 건설하는 일이다.

이는 단순한 걸설사업에서 한 걸음더 나아가 남북간 기술문화의 동질화를
이룩하고 과학기술의 공동발전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는 사업으로 성공적인
완수를 위해 남북한 종합 장기원자력정책을 마련하는등 정책의 치밀성을
요구하는 사안이다.

또한가지 중요한 일은 보도된대로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등의 외국에
우리의 원전기술을 수출하는 문제이다.

원전기술의 수출이 가능하려면 먼저 우리나라 원자력산업의 구조를 개선
하여야 한다.

중구난방식의 무책임한 내부경쟁방안으로는 실제 수주도 어렵고 수주한다고
해도 장기적이고 책임있는 사업 수행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밖에도 핵폐기물관리시설을 건설하는 문제도 부지선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행 핵주기 사업의 완성을 목표로 구체적인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

이러한 현황과 여론을 인식할때 우리는 원자력 행정체계의 조속한 일원화와
안정화를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

바람직한 원자력 행정체계는 초당적이어야 하고 여야가 공히 인정하고
합의할수 있는 조직과 관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첫번째로 해야할 일은 국회가 인준하는 원자력위원회를
초당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원자력위원들은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임기를 보장받고, 권위있고
지속될수 있는 결론을 내리도록 책임과 권한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

외국의 원자력 산업계의 준비활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며 민족적
양심에 충실하고 현실적 이해관계에서 초월할수 있는 명망과 국민적 신임을
갖고 있는 원자력위원회를 구성하여야 한다.

이 최고기관으로 하여금 기본정책을 정하도록 하고 원자력 관련 기관들을
통합 감독케 한다면 좋은 성과를 기대할수 있을 것이다.

핵폐기장 부지문제로 요란하였던 안면도 소요 사건이 일어난 것도 벌써
4년전의 일이 되었다.

안면도 사건을 숨어서 일으켰던 장본인들도 조용히 사라졌고, 쉽게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도 원자력계를 떠났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국민들은 불안한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다.

정부와 국회는 하루 바삐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현명한 근본대책을 마련
하여야 한다.

문제해결의 핵심은 국민이 믿을수 있고 책임을 물을수 있는 안정된 의사
결정 행정체계를 확립하는데 있다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