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덕 <부산대 교수>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쉽게 흥분하고 또 쉽게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부문이나 문제가 터질 때마다 야단법석을 떨다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슬그머니 잊어버리거나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

한국 신발산업의 경우가 그 좋은 예에 해당한다.

80년대 후반까지 한국 수출의 "효자상품"이었던 신발이 내외 여건변화로
인한 경쟁력의 상실로 갑자기 주저앉게 되자 상당한 위기 의식이 조성
되었다.

오랫동안 상품별 수출순위 6위이내를 차지하던 신발수출과 생산이
두자리수 변화율로 줄어들자 그 파급효과가 위기감을 고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신발산업을 합리화 업종으로 지정하고 합리화 자금도
2,000억원을 마련하는등 대책수립에 부심했다.

그러나 합리화 지정기간 3년이 거의 다 지나가는 이시점에서 신발산업이
합리화되고 있는 증거는 거의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진단과 처방이 잘못된 때문이다.

합리화 자금이 누계기준 20%도 소진되지 않은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동안 시간이 상당히 흘렀기 때문에 신발산업문제의 심각성은
점차 잊혀져 가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이 세계에 수출하는 수만 가지 공산품 중에서 세계최고의 품질과
가격을 인정받는 제품은 아직까지는 신발이 유일하다.

이번에 부산에서 열린 "제2회 신발전시회"에서 들은 바로는 멕시코
에서는 같은 유명브랜드 신발이라도 메이드 인 코리아 표시가 있어야
제값을 받는다고 한다.

이 사실의 의미는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이미지를 일조일석에 형성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발산업은 사양산업이어서 빨리 포기하는 것이 좋고
첨단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첨단산업이 무엇인지 정의할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첨단산업은 한마디로 우리가 잘 모르는,그래서 잘 못하거나 경쟁력이
높지 않은 산업이기가 십상이다.

가장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것은 사양산업이고,잘 모르는 첨단산업을
해야 한다는 환상에 우리는 쉽게 빠져든다.

신발산업의 국제경쟁력이 급격히 악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국내외 경제여건변화가 그 첫번째 이유고 신발경영업자들의
안이한 대응자세가 두번째 이유이다.

그런데 그동안 신발산업만 여건이 나빠진 것은 아니다.

한국의 모든 산업이 고임금,노동력부족,후발개도국의 추격등 문제에
직면해 있다.

나아가 한국보다 임금이 몇 배나 높은 일본도 미국도 아직까지 제조업
으로 버티고 있다.

세계 최고의 일류제조기술을 가진 한국신발이 포기되거나 방기될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한국신발산업이 그동안 급성장과 급쇠퇴를 경험하게 된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신발 제조와 판매의 완전한 분리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그것을 파는 기술이나 시스템이 없으면
제조자는 판매자에 예속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위 OEM (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에 의해서 한국신발제조업자들은
판매에 걱정없이 주문대로 만드는 재미에만 빠져 있었다.

제조상의 핵심기술도 주문자가 개발하여 특허상태로 이용했으며 한국의
제조기술은 그동안 공정기술의 개발에만 국한되었다.

이런 기술은 한국보다 임금이 몇 배가 싼 다른 나라도 어렵지 않게
익히거나 배울 수 있다.

주문자는 같은 품질이면 보다 싸게 만들수 있는 제조선을 찾는다.

한국에서 제조된 신발도 나이키나 리복 상표를 붙여 역수입되어야 한국
에서 판매되는 현실에서 대규모 제조업이 도산된 것은 예정된 일이지
우연이 아니다.

이런 명백한 이유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신발산업합리화 조치가
성과를 거둘수 없었던 것이다.

신발은 의류와 유사하다. 품질 디자인 못지않게 브랜드 이미지가 구매를
크게 좌우한다.

설사 아무리 좋은 기술과 아이디어가 있어도 미국과 같은 거대한
소비시장을 파고들어가려면 마케팅을 위한 조직과 광고를 위한 자금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지금까지 OEM에만 주력하던 제조회사와 아이디어를 가지고 세계시장에
파고들려는 소규모업자의 개별적인 노력으로는 발붙일 힘도 틈도 없다.

지금까지 몇몇 업체가 독자브랜드로 세계시장에 진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연간 수억달러대의 광고비를 쓰는 나이키와 최고 30여만달러를 쓴
회사가 경쟁이 될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방법은 자명하다.

세계의 유수브랜드와 경쟁할수 있는 "판매회사"를 설립하는 길이다.

이 회사는 판매와 연구개발기능만 갖추고 미국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
하게 한다. 본사가 뉴욕이나 시카고에 있어도 무방하다.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신발판매 경영인을 공채하여 독자브랜드를 판매
시킨다. 물론 제조기술은 최일류여야 한다.

연구기능은 기존의 한국신발연구소를 흡수확대하여 전담하도록 하면
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하던 OEM생산을 중단할 필요도 없다. 이 회사는
또다른 국제브랜드 바이어(판매선)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설립을
위해서는 각계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먼저 자구노력이 있어야 한다. 출자는 현금이나 담보 또는 기존
독자브랜드 어느 것이나 가능하도록 한다.

다음으로 부산지역상공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전경련이나 기타
경제단체들도 국제경쟁력강화 차원에서 출자하도록 유도한다.

정부도 지금까지 합리화자금으로 배정되었던 미사용대출금이 출자로
전환될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배려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회사가 품질과 가격을 바탕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시장에 진출한다면 성공가능성은 충분하다.

나이키도 70년대에 보따리 장사로 한국에서 물건을 주문하여 성공한
회사이다.

틈새시장( niche )전략을 구사하되 상당한 자본력과 기술로 뒷받침하면
성공하지 않을수 없다.

지난달 부산국제신발전시회에서 보여준대로 그동안의 제조경험에
판매시스템이 접목되도록 하는 제도적 노력을 민.산.관이 합동으로
신발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지기전에 추진할 것을 촉구한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