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터진지 오늘로 18일째다.

국내뿐 아니라 일본등 여러 나라에서도 앞으로의 사건처리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아무리 변명한다 해도 이미 깎인 한국의 체면이 말끔히 원상 회복되긴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하기에 따라선 10.21사건을 전화위복의 호기로삼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름아닌 철저한 제도 관행의 재정립과 그 망각없는 시행을 통한 같은
공사의 시공및 사고의 재발 방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사고원인 규명과 냉철한 사태의 수습이 선행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돌이켜 보면 사회이목이 집중된 사건일수록 1원인규명의 비과학적이고
감정적인 접근 2책임전가를 위한 줄다리기 끝에 국민감정 무마를 위한
일벌백계식 사법처리 3민중의 망각심리를 이용한 처벌 제도정비등 후속조치
의 유야무야로 무한 순환하는 것이 이 사회의 고질로 뿌리내리고 말았다.

우리가 경제개발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동안 외관과 속도외의 모든
덕성은 배척되었다.

성질상 이 두가지는 가시적이어서 질이 아니라 수량으로 계측된다.

거기에는 안전 내구 외공해 소비자보호가 들어설 공간이 없고 사고가
터져도 잘잘못은 개발속도에 대한 기여의 측면에서 가려졌다.

석유파동이 난 70년대를 넘기면서 세계환경도, 개도국 한국의 입지도
달라졌다.

조잡한 질의 물량만으로는 경쟁에서 이기기는 커녕 살아남을수 조차
없게 되었는데 그같은 환경변화에 상웅한 의식전환이 따르지 않은채
80년대를 허송, 90년대 탈냉전과 무국경 경쟁시대에 들어선 우리의
현주소가 문제다.

과거 30년의 관성은 무너져야 하는데 그 자리에 새시대 의식이 준비되지
않은 바로 이 시점에서 터진 사건이 다름아닌 10.21 성수대교 붕괴사고다.

따라서 이 사고는 반드시 한국 성장사의 전사와 후사사이를 획하는 전환점
이 되어야만 한다.

만일 그냥 지나치려 한다면 21세기에 쓰여질 세계사속의 한국란에는 "선진
개도국까지 발전했던 경험을 가진 나라"라고 기록될 것이다.

그대신 "94년10월21일 한강다리 붕괴를 계기로 분발하여 드디어 세계의
기적을 완성해낸 최선진 그룹의 일원"으로 쓰이기 위해선 성수대교사건
처리에서 정치권및 당국 사직 직간접 당사업계 국민 모두가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첫째 떠들썩하고 사려얕은 여론의 비등과 거기 놀아나거나 편승하는 정.
관.언및 시자들의 방향상실이 문제다.

속보에 집착하는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 충족, 재발의 경계라는 변을 갖지만
매체간의 과열경쟁은 본의와 달리 잦은 혼선과 오도를 결과하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이에 대한 정치권의 편승과상하 당국의 소국적 수동적
책임회피 처신에 있다.

사건의 원인 규명에서 치안 검찰 사법기관이 주도적 위치에 서야 함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 위치들의 도치현상이 너무 자주 목격된다.

국회의원이나 고위층이 시도 때도 없이 나서서 본질에 영향이 미칠 언동을
꺼림없이 한다.

그들은 느끼는대로 말을 쏟아놓지만 실무자나 전문가들에게는 절대적
영향을 준다.

명을 쥐고 있는 사람이 동이라 하는데 그 서라고 반론할 공무원은 없다.

둘째 그런 중구난방 풍토속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법이 아니라 애국심,
여론이라는 주먹이다.

거기에는 군중을 순간 감동시키는 마력이 있어서 일단 말려들면 공격자나
방어자나 헤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도 검찰이건 시건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다.

전임 시장의 조사여부로, 또 건설업체 조사문제로 얼마나 변덕이 많았던가.

단 며칠만에 나온 동아건설회장의 새 교량건설 헌납이란 발표와 그뒤
검찰조사를 둘러싼 쌍방 태도간에는 일관성이 없어서 역시 종잡을수가 없다.

무조건적 사과와 헌납 결심이 순수한 자발이었다 해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더구나 한점의 타의라도 섞인 결정이었다면 더욱 중대문제다.

자유기업의 시장경쟁원리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법리는 온데간데 없이
기업의 자산헌납으로 사태수습을 의도했다면 언어도단이다.

셋째 10.21사고의 결정적 교훈은 재발방지를 위한 탄탄한 제도와 관행개선
이어야 한다.

이것을 몇달 몇년 걸려서라도 해낼수 있다면 전화위복이 되고 한국인은
세계적 모범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사태처리를 각기 담당자에게 분담시키되 6개월쯤 지나면
자동으로 잊지 않게끔 안전장치가 꼭 필요하다.

사법처리는 전권을 가지고 검찰이 맡아 운수나쁜 몇사람에게 뒤집어 씌워
엄벌하는 시늉 하다가 얼마안가 풀어주며 먹은 돈으로 잘살게 해주는 판박이
놀음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한다.

끝내 제도와 관행의 시정보완을 총괄하고 채근하는 일은 아무때나 경질되는
총리가 아니라 파격적으로 대통령 자신이 자임하는,그야 말로 "특단"을
보였으면 한다.

만일 이 정부가 앞으로 3년여 동안 다른 일 다 접어두고 이문제 하나만
뿌리를 내릴수 있다면 통일 못지 않은 위업이 될것이라 우리는 확신한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