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행장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윤순정 한일은행장이 돌연 중도하차하면서
금융권이 냉기류에 휩싸였다.

시기적인 정황으로 보아 단순한 "용퇴"로 보기엔 석연찮은 대목이
있어서이다. 바로 금융권을 대상으로한 "제2의 사정"이 몰아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들이다.

항간에 알려진 전후사정은 이렇다.

윤행장 중임선임 당시 경합을 벌이다 물러난 전직임원이 청와대에
여러차례에 걸쳐 투서를 냈으며 사정당국이 정밀조사에 착수할 것을
통보해 오자 사퇴를 결정했다는 줄거리다.

투서의 내용은 윤행장의 개인생활이 문란하고 친인척 18명을 한일은행
관계사에 취직시켰으며 법정관리를 받고있는 대한유화에 부실대출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사정당국은 이 투서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1차내사를 벌였으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고 다시 정밀조사에 착수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않아도 때를 보아 그만두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해오던 차에 자신을
조사한다고 하자 퇴진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소문대로 라면 윤행장의 하차는 "일과성"인 것으로 볼수 있다.

특별한 경우일 뿐 전반적인 기획사정의 결과는 아니라는 얘기다.

박재윤 재무부장관도 4일 "사정은 아니다. 비리문제 였다면 법에 따라
사법처리 됐을 것이다. 본인의 사퇴이며 더이상 은행장이 물러나는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특히 새정부 들어선 이후 윤행장이 눈에 띨만한 하자가 없었다는 점도
들수 있다.

오히려 은행장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본인소유의 골프장 회원권을 처분
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조직적인 사정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사건"의 성격이 강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금융계 일각에선 이번 일을 그렇게 간단하게 보지 않고 있다.

한번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시각이다. 우선은 시기적인 정황을
든다.

성수대교 붕괴와 사병의 장교사살 사건등으로민심이 흉흉해져 있는
시점이어서 오비이락이라기엔 의도적인 냄새가 난다는 인식이다.

국면전환용으로 사정으로 과녁을 돌렸으며 그 첫화살이 금융계로
날라온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만일 제2의 사정이 벌어진다면 종전과는 달리 새정부 이후의 하자가
없더라도 과거의 비리까지 캐내는 양상이 될 것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더군다나 윤행장의 퇴임설이 그동안도 간간이 흘러다녔고 다른 행장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대출커미션 수수나 사생활문제등을 들어 나돌고 있는 국책은행장과
시중은행장 내사설이 그것이다. 또다른 금융단체장의 경질설도있다.

작년봄 처럼 무더기 퇴진은 아니더라도 몇몇사람이 추가로 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경위와 배경이 어떻든 금융계에선 이번 사건을
그리 곱게 보지 않고 있다.

은행장추천위원회에서 선임된 행장을 "투서"내사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다.

만일 비리가 있다면 당당하게 사법의 심판을 받게하는 게 옳다는
지적이다.

새정부들어 줄기차게 외쳐온 금융기관장 인사자율화가 허황된 구호
였음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준 계기였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은행장이 "용퇴"라는 성명을 내며 물러나고 당국은 "자의로 그만두었을
뿐 더이상은 없다"고 해명하는 눈가림이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느냐는
이들이 많다.

<정만호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