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든 집단이든 여럿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려면 내부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누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느냐, 누구에게 더 유리하도록 방향을 잡느냐
등을 놓고 각 구성원들은 치열한 주도권싸움을 벌인다.

APEC도 이같은 일반론에서 예외일수는 없다.

APEC은 지난 89년말 창설된후 처음 몇년간은 내부갈등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APEC이 소속 회원국들간의 경제협력방안을 모색하고 공동관심사를 논의하는
단순한 협의기구수준에 머물렀던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다 작년 7월 도쿄 선진7개국(G7)정상회담을 계기로 주도권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국은 그동안 아세안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회원국들의 세력에 밀려
APEC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빌 클린턴미대통령이 G7정상회담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함으로써
주도권싸움은 본격화됐다.

클린턴대통령은 각료회담수준에 그치고 있는 APEC을 정상회담으로 격상하고
신태평양공동체 설립을 주창했다.

아.태지역에서 일본에 밀리고 있는 경제적인 영향력을 만회하고 아세안
국가들의 미국견제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APEC창설멤버가 된것은 무엇보다 일본을 견제하면서 이 지역에서
미국의 경제적인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아.태지역에서 누리고 있는 경제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고 미국의
영향력잠식을 견제하기 위해 APEC의 창설멤버가 됐다.

일본은 또 APEC이 미국생각대로 나아가게 되면 APEC의 초점이 일시장개방에
맞춰질 것을 우려, 미국독주에 제동을 걸고 있다.

일본이 말레이시아의 동아시아경제협의회(EAEC)창설계획에 대해 겉으로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EAEC를 지원하고
있다.

말레이시아가 EAEC와 관련, 미국배제론을 들고나온 이면에는 일본이 이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의 세력다툼이라는 특성을 안고 출범한 APEC은 선진권과
개도권의 대결, 아시아와 미주세력간의 대립이라는 구도를 갖고 있다.

이는 APEC내에서의 주도권을 서로 차지하겠다는 속셈과 연결된다.

선진권과 개도권간의 대립구도는 미국 캐나다 일본등 소위 선진회원국들과
아세안, 중국이 주축이 된 개도권회원국들간의 주도권쟁탈전과 다름없다.

개도국은 선진국이 그들의 의도대로 APEC을 이끌어가 개도국을 수출시장
으로 삼으려는 저의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말레이시아가 미국을 뺀 EAEC의 창설을 주창하는 것이라든가 아세안이
독자적으로 APEC내에서 아시아자유무역지대(AFTA)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목소리를 키우기 위한 몸부림들이다.

말레이시아는 특히 미국배제론을 내세우면서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를
외치고 있다.

아세안국가들이 미국의 APEC정상회담개최에 대해 처음에 반대하다가
마지못해 회담에 참석한 것은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아세안은 APEC이 미국주도로 나아가면 AFTA의 성과를 희석시키거나
아세안국가들의 산업구조조정을 어렵게 할것이라는 우려가 아세안내부에
강하게 퍼져 있다.

아세안이 유난히 러시아의 APEC가입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 것도 미국의
주도권을 막기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중국은 정치적인 이유로 대만과 홍콩의 발언권이 커지는 것을 경계함과
동시에 아시아지역에서의 일본과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결론적으로 APEC은 넓게는 선진권과 개도권의 대립, 좁게는 미국대 일본
미국대 아세안 미.일에 대한 중국의 대결구도로 짜여져 있다.

겉으로는 상호경제협력을 통한 공동발전을 외치고는 있다.

그러나 속에서는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고 서로의 구미에 맞게 APEC을
끌어가기 위한 회원국들의 이해다툼이 치열하다.

< 이정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