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에 심한 가뭄으로 흉녕이 들어 도처에서 백성들이 굶어죽고 유랑하던
성종13년(1482) 2월의 일이다.

밤낮으로 근신하며 조바심하던 성종은 평안도관찰사 신정의 보고를 받고
찌프렸던 얼굴을 활짝폈다.

"평안도 영내의 아전들로 하여금 도토리 20만석을 거둬들이도록 하며
진휼에 힘쓴 결과 굶어죽기에 이르는 자는 없습니다. 또 이제 날이 따뜻
하여지고 눈이 녹으니 물고기와 푸성귀를 먹을수 있게 되여 더욱 염려가
없습니다"

평안도 전도의 백성들이 모두 다 도토리를 줍는다고 해도 20만석이 될리가
없는 노릇이고, 아직 겨울인데 물고기와 푸성귀를 먹게 되었다니 과장이
지나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성종은 우선 마음이 놓였다.

조정에서는 서위보고를 한 신정을 임금을 속인 죄로 불러 올려 추국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중론은 신정의 보고내용이 비록 사실은 아니더라도 당장 백성들을
굶기지 않았으면 좋은 것이 아니냐는 쪽으로 기울었다.

믿지 않다가 속으나 믿다가 속으나 속기는 마찬가지라면 믿다가 속는편이
한층더 인간적인 것이 된다는 조선조의 망국적 사고방식이 임금과 조정
대신들의 뇌리속에 박혀 있었던 탓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정이 공문서를 위조한 중죄를 지어 옥에 갇히자
성종은 그의 보고내용의 진위를 조사시켰다.

신정은 지방유지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곡식을 마구 나누어 주어 그것으로
논밭과 집을 산자들이 수두룩했다.

얼마 남지 않은 곡식으로 죽과 밥을 지어 수레에 싣고 들로 쏘다니면서
생색을 냈으나 정작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 죽고 말았다.

국고가 텅비자 궁여지책으로 꾸며서 보고한 것이 "도토리구제"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가 올린 보고는 모두가 거짓이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진노한 성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정을 사사시켜 버렸다.

모든 허위보고이면에는 이처럼 항상 보고자의 명예욕 탐욕 교만이 깔려
있게 마련이다.

지난 며칠새에 일어난 대형 참사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관계자들은
아랫사람이나 위사람이나 모두 요행만 바라는 허위보고에 익숙해 있었음이
간파된다.

허위보고를 받고도 "어차피 속을 바에는 믿는척이나 하고 속자"는 고위
공직자들의 고질적 의식이 더 문제다.

이렇게 보면 그들 모두가 공범이랄수밖에 없지 않은가.

떳떳하게 참사의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