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토 교수가 "경제발전의 제단계"를 발표한 것은 1960년이었다.

그리고 1년뒤 한국에선 박정희군부가 미명의 한강인도교를 건넌다.

로스토 "개발론"의 첫장을 연 셈이다.

당시 서울인구는 280만.

거리 한복판을 "땡땡"소리를 내며 달리던 전차는 한가롭기만 했다.

1인당 GNP 82달러.필리핀과 태국의 경제를 선망하는 여행기들이 월간지
사상계와 신동아를 장식할 정도였다.

한국경제 30년의 개발연대는 이같은 상황에서 막을 올렸다.

문민시장경제로 바통을 넘길때까지 이기간은 크게보아 10년단위로 호.불황
의 사이클을 그렸고 그때마다 사건과 정책은 확대재생산된다.

경제가 불황의 골에 빠지면 정치사회의 위기가 증폭되고 위기는 또 철권에
의해 강제수습돼 왔다.

거부와 졸부들이 탄생하고 쓰러져갔다.

이런 과정에서 산업자본이 형성되고 국가경제는 덩치를 키워갔다.

개발연대 이전의 산업은 물론 쌀이었다.

다음은 경공업과 무역이며 건설 중공업이 순번을 이었다.

삼성과 현대의 창업자는 모두 미곡상에서 일했다.

신동아 한국유리 동양시멘트도 싸전에서 기업했다.

개발 전사요 1세대들이다.

62년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바로 이들을 개발작전의 선봉으로 세운
것이었다.

군부는 이른바 부정축재기업인에게 국가경제에 기여할 것을 명령하고
기업인들은 이에 호응해 오늘날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를 창립
(61.8)했다.

개발의 전략은 그야말로 군대식 강제 동원체제였다.

그러나 자금동원을 위한 62년 통화개혁은 단순한 "디노미네이션"으로
변질되면서 실패로 끝난다.

그래서 대일청구권 자금을 앞당겨 받아야 했고 서독광부파견과 월남파병이
이어진다.

파월군인들이 70년말까지 4년동안 국내에 부쳐온 돈은 6억2,000만달러.

이기간중 대일청구권자금과 미국의 대한투자 유입액을 능가한 규모다.

"피"를 바쳐 일으킨 경제였다.

근로자 해외송출도 빼놓을 수 없다.

70년대 후반 중동으로 돈벌이를 떠났던 근로자는 80년까지 4년간 줄잡아
40여만명.

70년대는 역시 공단의 시대였다.

67년 설립된 구로공단이 본격가동되고 마산 수출자유지역(71년)의 진입로는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는 여공들로 길을 메웠다.

농촌인구는 도시로 흘러나와 거대한 산업예비군을 편성했다.

60,70년대는 기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에겐 온갖 종류의 특혜가 주어졌지만
모두가 성공적으로 기업을 꾸려간 것은 아니다.

최초의 불황이 닥쳐온 69년엔 30여개의 부실외자기업들이 정리된다.

이 위기를 정치적으로 맞받아친 것이 72년 "유신"이었다.

유신을 떠받친 철권통치는 긴급조치와 검거선풍을 되풀이했고 시인 지하는
비어를 노래한다.

부국강병의 시대는 언제나 시인을 낳아 왔다고나 할까.

이런 가운데 포철이 불을 뿜었다.

전자업체 조립라인엔 텔레비전이 올려졌다.

쌀가마니를 실어나르던 정주영현대 명예회장의 자전거는 자동차가 되어
수출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삼성의 고 이병철회장은 말그대로 산업의 쌀, 반도체의 꿈을 키웠다.

70년대 중반의 일이다.

산업구조는 77년을 지나면서 중공업우위를 확립했다.

자본집약적 중공업이었던 만큼 수출이 뒷받침되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대통령은 "야전사령관같은 폼"으로 수출진흥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수출은 곧 보국의 길이기도 했다.

64년 1억달러를 넘어선 수출은 그렇게해서 70년대 들어 연 35%씩 기록적인
증가를 계속한다.

76년엔 "포니"가 처녀수출되고 77년 12월엔 대망의 100억달러를 넘는다.

대우의 김우중회장은 태평양을 건너다니며 70년대를 타고 넘어 10년만에
30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신화"를 창출했다.

그는 지금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은" 사람이다.

또다른 김우중을 꿈꾸었던 제세와 율산은 그러나 "옛날 옛날 한옛날..."을
한탄하며 퇴장했다.

73년과 79년의 양대 오일쇼크는 한국경제의 위기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1차오일쇼크는 오히려 "복음"으로 치부될 만도 했다.

오일머니는 중동건설 경기로 효자가 되어 돌아와 80년까지 290억달러의
큰돈을 벌어주게 된다.

그러나 70년대가 깊어갈수록 소외와 희생, 강압과 저항도 커졌다.

중화학공업이 투자의 80%를 쓸어가면서 경공업은 사양산업으로 조락한다.

개발연대 제3기 80년대 첫해는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위화감을 우려해 시판이 금지됐던 컬러텔레비전이 경기부양(내수진작)을
위해 시장에 나온다.

정부는 5공초기의 안정화 시책으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지만 또한편
사회간접자본(SOC)투자부진이란 후유증을 남긴다.

5공화국이 안정기에 접어들 즈음 장영자여인 사건이 터졌다.

그녀는 10년도 더 지난 93년 또 사고를 저질렀다.

62년 화폐개혁, 72년 8.3조치, 82년 장여인사건, 93년 금융실명제를 일직
선상에 놓고 보면 검은 돈과의 싸움도 경기와 더불어 10년을 주기로 반복
하고 있다.

재계의 판도역시 10년을 주기로 부침의 곡선을 그린다.

70년대말에 이어 80년대초에도 부실기업 정리가 있었다.

산업합리화의 이면엔 무리수도 따랐다.

공중분해된 국제그룹의 양정모회장이 명예를 회복한 것은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8년을 인고한 93년의 일이다.

평자들중에 국내경기는 해방후 네번의 사이클이 있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
이 많다.

57년은 전쟁복구에 힘입은 첫호황기였다.

68~69년이 월남특수였다면 76~78년은 중동붐이 경기를 끌어갔다.

그리고 86~88년은 3저경기였다.

흑자시대가 오고 주식시장은 주부와 샐러리맨들로 달아올랐다.

그러나 절대기아가 해소되면서 분배 욕구도 커졌다.

6.29선언이 있던 87년부터 연대말까지 날을 지새워온 노사분규였다.

80년대엔 지구의 반쪽, 사회주의 체제가 시장경제로 돌아왔다.

국내적으로도 권위주의 체제가 막을 내렸다.

60년대에 시작된 유럽통합논의도 93년엔 법적인 결말을 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전체가 한 사이클을 돌았다.

그리고 UR와 함께 무한개방과 국제화의 시대가 왔다.

21세기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 흐르고 있다.

북한까지 싸안고 2인3각으로 뛰어야할 20세기말이다.

< 정규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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