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조석 살림살이 보살피기 어려울 줄 여기어 이제 한인 하나를
보내어 나무 쪼이고 물긷기 수고를 덜가 한다.

이도 사람의 아들이어서 착히 대접함이 옳으니라" 도연명이 벼슬을
얻어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을때 고향 집 일을 돕도록 하인 한사람을
보내면서 아들에게 전하도록한 편지 한쪽의 내용이다.

"소학"에 실려있는 것을 정지용이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원문보다
더 정감이 넘친다.

본래 28자로 된 간결한 한문편지로 다소 길어진 듯한 느낌은 없지않지만
아버지의 정을 한글만으로도 이렇게 훈훈하고 아름답게 표현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어떤 기자가 정지용에게 조선시인들이 일반적으로 조선말의 어휘가
부족하다고 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되지 않은 말입니다.

외국어를 먼저 알고 조선말을 번역하려니까 그렇지 그럴리가 있나요.

배우지 못한 탓일 것입니다" 그는 조선어에 대한 자존심과 자신을
갖는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정지용은 우리 언어의 감각미와 이미지의 시각성을 돋보이게 한
시인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움을 우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러야"(향수) 한국근대시사에서 정지용만큼 한국어를 새롭게
구사하여 새로운 시적 경지를 일구어낸 시인은 많지 않다.

그는 다른 시인들처럼 외국사조의 영향을 받아 남의 목소리를 빌어
노래하지 않았다.

조국산하를 밟고 다니면서 우리 말 우리 글의 기능을 철저히 추구해
그 속성을 파악하고 그것의 감각미를 개척한 시인이다.

시는 언어와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시인은 그것을
배우고 캐내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해방뒤 우리는 정지용을 비롯한 선구적 문인들이 애써 찾아내 쓰던
아름다운 토속적 이휘마저 깡그리 잃어 버리고 말았다.

문학작품에서는 물론이고 방송 신문 잡지 광고 대학강의실에서는
현대판 이독같은 외래어가 판을 친다.

정부의 어문정책은 믿을 것이 못되니 번데기로 비단옷을 만든다는
위대한 시인들의 출현이나 기다릴수 밖에 없지 않은가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