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간의 임금체불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업원들은 동요없이
작업에 임해줬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회사가 회생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즈음 나는 한국생산성본부에 의뢰해 행남사에 대한 기업진단을
받았다.

이제 어느정도 규모가 커진 행남사의 더욱 큰 도약을 위해서는 이전의
전근대적인 경영방식으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생산성본부에서는 과연 치밀한 기업진단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 인사
품질 판매등 여러군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하지만 그 해결방법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난관이 따랐다.

가장 큰 장애는 도자기산업이 모든 작업과정을 사람의 손에 의존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라는데 있었다.

결국 생산선본부의 진단은 의사가 처방전을 써줬지만 환자의 특수체질상
그 처방전은 아무짝에도 써먹을수가 없었다.

당시 행남사 정도의 규모로 기업진단을 받는다는 일은 상당히 선진적인
시도였음에도 진단자체에서 끝났다는 점이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이때의 진단결과는 이후 행남사에서 전개되었던 무결점(ZD)운동
품질관리(QC)운동등 여러가지 생산성향상과 경영합리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렇듯 기업이 안정궤도에 진입할 무렵 내가 가장 역점을 둬서 했던
일중의 하나가안정적인 원료공급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원료가 곧 양질의 품질을 보장하기 때문. 도자기산업에
있어서 원료는 곧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전부터 각지의 원료광산들을 직접 관리했고 그 발견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는 해남 화원면 애락리의 점토 송이도의 구석 안성의 규석질 카오린
함평 손불면 점토 담양 벤터나이터 장흥 보림사의 백토등을 직접 관리
운영했고 이외에도 전국 각지를 돌며 끊임없이 탐광 시굴작업을
계속했다.

아무리 멀고 구석진 곳이라도 원료 비슷한 것이 보였다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내가 직접 찾아가 시료를 채취해서 서울에 있는 분석실로
보내거나 공장 라인에서 직접 현시시섬을 하기도 했다.

해방후 한때 부산에 이는 대한도기의 자기제품들이 일제시대의 것에
비해 엄청난 품질의 차이가 있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원료문제 때문
이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그 무렵 그런 대한도기에 주요 자기원료인 점토를 공급해줬을
정도로 튼튼한 원료공급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즈음 나는 초대 사장이시던 아버님을 대신해 2대 사장에 취임했는데
이는 행남사로선 그동안 내가 줄곧 실질적인 경영을 해왔기 때문에
그리 특별한 조치가 아니었다.

창업이전부터 계속해서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아버님께서
그무렵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셨기 때문에 내가 사장으로 취임했던
것이다.

이후 창업 25년째인 67년 가을 아버넘께선 끝내 유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다.

고려청자와 이조백자의우수한 문화전통을 계승하여 우리민족의 식기는
내손으로 직접 만들어 보급하겠다는 일념으로 행남사를 창립하셨고
이제 막 회사가 기틀을 잡아가는 시기 아버님께선 애써 가꾸시기만
하고 피어나는 꽃도 보시지 못한채 그만 세상을 떠나가신 것이다.

이를 일러 누가 천붕지통이라 했던가.

나는 근검절약하셨던 아버남 평소의 유지에 따라 검소한 장례식을
준비했는데 장지는 무안군 삼향면으로 400여명의 종업을 둔 목포
최대규모 회사의 장이 안장된 묘지치고는 사뭇 초라할 정도였지만
아버님과 함께 교류를 나누셨던 전국의 지기들과 수많은 목포시만들이
장례식에 동참하여 아버님의 유업을 기렸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