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중반이후 스테인리스 용기의 등장이라는 도자기업계 최대의 돌발
변수가 생겨났다.

당시 새로 선보여 도지기시장을 잠식해 들어왔던 스테인리스 용기는 금속
성분이 묻어나와 위생상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생활수준이 위생면
을 따질 겨를이 없었던 때인지라 값이 싸고 깨지지 않는다는 이점때문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도자기에서 스테인리스로 눈길을 돌렸다.

이는 가히 "스텐그릇 열풍"이라 할만 했는데, 신공장 건설로 인한 경영
압박에 시달리던 나에게 설상가상의 무거운 짐이 되기에 충분했다.

우선 아쉬운대로 가까운 목포 시내에서 고리의 사채를 동원애 쓰다 보니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갔고, 이것을 제때에 처리하지 못했던 관계로 커진
빚은 다시 회사의 자금난을 부추겼다.

마침내 목포 시내에 "행남사가 부도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아버렸다.

이런 소문은 나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으니, 나는 물론 경리과 직원들까지
아침저녁으로 사채업자들을 만나러다니는 일로 업무를 대신해야 했다.

한번 악화되기 시작한 사태는 걷잡을수 없었다.

빚은 이자에 이자가 덧붙는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끝없이 경영상태를
옥죄어왔다.

게다가 한창 물품공급이 달리던 때라 이미 판매된 대금회수마저 요원하기만
했다.

상황이 이지경에 이르고 보니 행남사와의 거래라면 줄을 섰던 사람들까지
행남사를 외면했다.

예전 같으면 외상으로라도 생산자재 공급을 서로 하려던 사람들이 이제
현금이 아니면 일절 거래를 하려 하지 않아서 자금운영을 더욱 어렵게
했고, 회사는 물론 우리 회사에 근무하는 사원들까지 이전 같으면 행남사
직원 하면 믿을 만한 외상거래자들이었는데 이제 신용이 떨어져 생필품을
현금이 아니면 살수가 없다는 하소연까지 했다.

때문에 나는 서울 등지를 돌면서 사채를 구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알아차린 사채업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수표를 돌리겠다"고
전화를 해와 나는 또 그들을 무마하느라 실로 제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 위태로운 상황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당시의 내 처지가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마침내 내게 회사를 매각 처분하라는 권유를 해오기에
이르렀다.

실제 나도 하루는 회사 경리장부를 모두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 밤새
뜬눈으로 부채계산을 해봤는데, 회사를 매각하면 아무리 도매금으로 넘긴다
해도 그때까지 끌어썼던 빚을 모두 갚고도 1,000만원 정도는 건질수 있을
것 같아 "더 늦기 전에 매각처분을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차라리 깨끗이 처분해 빚을 청산하고 마음 편하게
살아봤으면"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행남사가 어떤 회사인가.

아버님과 내가 일제시대 때부터 갖은 역경을 헤치며 일궈온 가히 나의
모든 것이 아니던가.

초창기부터 동고동락하며 회사를 지켜왔던 사람들, 새로 직장이라고 들어와
저마다 부푼 앞날을 설계할 종업원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도저히
그냥 주저앉아 버릴수는 없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직 1,000만원 정도의 여유는 있으니까 그것이 소진하는
날까지라도 사명감으로 버텨나가기로 했다.

이런 나의 애끊는 사정을 알아주기나 한듯, 때마침 정부에서는 각지에
기업운영을 위한 특혜자금을 배정해 줬었는데, 목포에 배정된 것이
5,000만원.

나는 한일은행 목포지점을 통해 그중 2,000만원을 얻어, 그 동안의 부채중
우선 다급한 1,500만원을 갚고 나머지 500만원은 운영자금으로 쓸수 있었다.

다시 운영자금이 투입되니 회사는 정상을 되찾게 되었고, 문제 많던
신공장 라인도 기술자들의 부단한 연구 실험 결과 정상적인 가동을 할수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