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고 그렇듯 산은 말이 없어 좋다. 더욱이 어둠이 채 물러가기 전의
새벽 산은 산이 내뿜는 정기와 함께 산보다 더 큰 침묵으로 우뚝하여
좋다.

대학 졸업이후 나는 세일즈 분야에서 줄곧 20년을 일해왔다. 어느 누구
보다도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많은 말을 해야하며 또 많은 말을
참을성있게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이일의 속성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에 이르도록 1주일을 정신없이 뛰다보면 자칫
때로는 내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또 어디를 향해 가고있는지 잠시
망연하기도 하다.

또한 몸은 몸대로 지쳐 내 통제를 벗어나 마냥 가라앉기만 한다. 이런
나를 가만히 끌어안아주는 이가 곧 산이다.

이러한 산행에 있어 형식은 애초부터 필요치 않은 허례일뿐 그저 부모
품을 찾는 아이처럼 소박하고 천진한 마음이 내 행장의 전부이다.

내가 가는 인생의 산행에서 소중한 두분의 스승을 나는 행복과 자랑으로
모시고 있다. 어쩜 나는 산같은 그분들의 말씀과 덕행의 길을 따라 걸으며
오르고 내렸을 것이다.

내 생애에서 산같은 가르침과 평안을 주는 두분은 곧 한미경영원 장우주
회장과 군부사령관을 역임하신바 있는 허쟁장군으로 이 분들은 나의
산이요. 또한 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본시 번잡한 것을 싫어하시는 분들인터라 두 스승을 따라 이른 새벽 서울
근교의 산을 호젓이 오르내리는것이 나에겐 더없이 큰 위안이자 휴식이며
또 크고 새로은 세계를 향한 출발의 발원이기도 하다.

세사람만의 산행이 다소 궁색해 보일지 모르나 자칫 사람이 많음에
따르기 쉬운 일상사의 번거로움을 염려하지 않아도 좋고 더욱이 새벽
산의 고요를 흐려놓지 않아 더욱 좋다.

별다른 말없이 터벅터벅 걸어오르는 산행에서 모처럼 잊고 살았던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훌륭한 삶으로 생의 정상을 앞서 걸어올라간 인생
대선배의 발길을 뒤따르는 동안 우리는 말없이 눈빛만으로도 이야기는
늘 넉넉하고 풍요하다.

앞으로도 조금도 달라질것 같지 않은 새벽 산행,늘 그렇듯 산은 말이
없고 산을 닮으신 스승 또한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매번 많은 것을
듣고 배우고 내려온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