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태상업은행장. 그는 작년 1월말 한 지점장의 자살사건여파로 상무
에서 전무(행장대행)을 잠시거쳐 "갑작스레" 은행장자리에 올랐다.

벌써 1년 8개월전의 일이다. 그러나 정행장이 홀가분하게 은행업무에만
전력할 수 있게된 것은 "최근들어"라는게 주변의 얘기다. 뒤집어 말하면
지난 1년8개월은 행장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정행장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은 부실기업 처리문제. 작년 10월
봉명.도투락 부도건도 그중 하나다. 정행장으로선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업규모도 큰 데다 소유주가 집권당 현직의원(이승무의원)이었다. 권부
쪽에서는 가능하면 "지원"했으면 하는 사인을 보내왔다.

그러나 은행쪽 판단으론 회생불가였다. 정행장은 권부핵심을 찾아 브리핑
을 했다. 요지는 이의원의 친형인 이병무아세아시멘트회장이 보증을 서면
지원해 주겠다는 것.

친형도 도와주지 않는 기업을 은행에서 지원할수 없다는 뜻이었다. 은행
부터 살고봐야 하기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최근 해결의 가닥이 잡힌 (주)한양건도 마찬가지다. 8천억원이상의
부채를 떠안고 있는 이 회사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매듭짓지 못하면
정행장은 물론 상업은행까지도 한양과 동일티켓으로 무너질 판이었다.

고민끝에 작년 5월 한양의 법정관리신청을 냈고 지금 주공과 인수계약을
맺고 합리화지정 요식행위만 남겨놓고 있다.

은행원 특히 행장이나 지점장을 막론하고 "장"들의 보람중 하나는 경영이
어려운 기업을 지원해 다시 살리는 일이다. 이게 최근까지도 상식이었다.

그러나 상업은행의 예에서 보듯 은행들은 이제 지원하는 기업과 지원하지
않는 기업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은행 자신부터 살고봐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은행의 "나부터 살기"의식의 확산은 기존의 금융관행을 이것저것 바꿔
놓고 있다. 가장 큰게 자금공급의 패턴변화다. "부도협의회"의 해체를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각 지역마다 "부도협의회"라는게 있었어요. 거래
업체가 위태로울때 관련 은행지점장들이 모여서 부도를 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협의하는 제도였지요.

부도가 나면 여러사람이 다치니 일단 신중하게 대처하자는 취지였어요.
그런데 최근들어 이 부도협의회가 슬그머니 없어졌어요. 지점장들도
살아야 하니까요. 괜히 끌어안고 있다가 부실채권을 떠안게 되면 그
날자로 대기발령이니 어쩔 수 없지요" 은행 일선 지점장들의 얘기다.

은행들은 더이상 담보가 없거나 신용이 취약한 중소기업체에는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는다. 부실징후만 보여도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하는
"조기경보제"가 점점 강화된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못해 신용금고를 찾는 중소기업이 부쩍 늘어나는
추세"(김홍수해동금고영업부장)이기도 하다. 경기가 좋아지는데도
기업부도율이 높아지는 이유중엔 이런 요인도 한 몫 한다.

"나부터 살겠다"는 의식은 금융풍토를 맑게 하는 작용도 한다. 과거엔
고위층의 청탁으로 "캄플주사"를 한방씩 놓아가면서 삶을 연장해간
기업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올들어서도 한국강관 대한유화등 쟁쟁하던
기업들이 캄플주사를 맞지 못해 "어어"하는 사이에 무너져 버렸다.

대기업들은 떠나고 불실기업들과의 거래는 끊어야 하고.. 진퇴양난에
빠진 은행들에게 탈출구는 좁다. 생각해 볼 수있는 탈출구는 중소기업과
일반 가계. 그런데 가계대출은 소비와 물가에 대한 우려때문에 정부에서
자꾸만 막는다.

중소기업들도 괜찮은 기업들은 자꾸만 해외로 떠난다. 생산은 중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 하고 국내에선 마케팅만하니 기업분석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중소기업들의 신용도를 적절히 평가할 만한 능력도
은행들에겐 없다.

"은행들이 대기업체를 찾아와 협력업체나 위장계열사 등 관련회사를
소개시켜달라고 해요. 이런 기업들은 비교적 안전하니까요.

역설적이지만 중소기업에 대한 여신을 강화하겠다는 은행들의 노력은
결국 대기업편중현상만 가속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기업
재무관계자들의 얘기다.

은행들은 "나부터 살기위해" 노력하지만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지 아직
혼돈스러운것 같다.

은행의 리스크관리는 여태까지 부동산담보를 챙기는 것이외는 없었다.
융자담당의 일은 대상기업의 부동산평가, 한마디로 부동산감정업무
뿐이었다. 은행이 "부동산을 잡고 돈을 꿔주는 전당포"라고 불리웠을
정도다.

그러나 이젠 담보가 유일의 대출조건은 아니다. 그만큼 산업구조가
달라졌다. 부동산없이도 유망한 중소기업이 얼마든지 있다. 제대로된
리스크관리가 필요해졌다는 얘기다. 은행들은 그래서 얼마전까지 한수
아래로 봤던 투금사나 보험사에서도 리스크관리기법을 배운다.

"은행들이 정말로 살아남기위해서는 철저한 기업분석을 통한 신용대출이
활성화되고 한도거래제 도입등을 통해 대출권한이 실무선으로 대폭 위임
되어야 합니다. 은행을 리엔지니어링했던 투금사들이 지난 20년 호경기를
누린 것을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요즘 은행원들에 대한 리스크관리학 강사로 자주 나서는 이정조
국민생명기업금융부장의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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