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불도 다시 보자".

새 정부가 들어선 뒤 한동안 과천관가에서 유행어가 된 말이다. 현직에서
물러난지 십수년된 "선배"들이 장관으로 화려하게 컴백하고 있는데 따른
"예비역 조심"표어다.

물갈이설이 나돌던 문민정부 출범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꺼진 불"은
경제팀 조각때 더 위력을 발휘했다.

현역퇴직 10년이 넘은 이경식가스공사사장과 홍재형외환은행장이 각각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과 재무부장관으로 금의환향한 것.

이어 6월의 부분개각때는 81년 상공부장관을 끝으로 외국어대교수등으로
물러나있던 정재석씨가 교통부장관자리에 오르더니 12월엔 이전부총리후임
자리를 차고 앉았다.

경위야 어찌됐건 "꺼진 불"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케이스들이 아닐 수
없다.

현역들이 "꺼진 불조심"을 외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예비역
선배들을 "업수이 여겼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않기 때문이다.

80년대초 신병현부총리때 경제기획원 국장을 지냈던 C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신부총리가 자리를 물러나자 "자질도 없는 사람이 부총리를 지냈다"
는 요지의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그런데 웬 걸. 그후 1년도 못돼 신씨가 다시 부총리로 돌아왔다. C씨는
"벙이리 냉가슴"이 될 수 밖에. "예비역"을 잘못 다뤘다가 벙어리냉가슴이
아니라 "찬 밥"이 돼버리는 경우도 적지않다.

김준성씨가 한국은행총재에서 경제부총리로 영전했을 때다. 당시 재무부
이재국장이었던 L씨는 오비이락격으로 경협관으로 "좌천"됐다.

금리인하등에 소극적이어서 김부총리가 재무장관에게 전보를 요청했다는
게 표면적으로 알려진 이유였다.

그러나 이재국장으로서 한은총재에 대해 부렸던 위세가 결국 "괘씸죄"로
작용했다는게 당시 주위의 평이었다.

꺼진 불-. 보통은 예비역이라고도 하고 OB로도 통한다. 물론 OB들중엔
장관으로 재기하는 "거물급"만 있는 건 아니다.

국.과장으로 물러나도 끊이지않는 생명력을 바탕으로 현직관료인 YB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다수다.

현역들의 도움을 받아 산하기관이나 기업체에 "새 둥지"를 틀고 말이다.
퇴직할 때의 직급에 따라 기관장(1급이상) 부기관장(국장) 임원(과장)
부.차장(사무관이하)을 꿰찰 수 있다. 이를테면 돈대신 "자리"를 종자로
분양받는 셈이다.

이 "종자"를 잘 가꾸는 예비역은 꺼진 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반면
영원히 꺼진 불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91년 상공부 상역국장을 끝으로 관복을 벗은 H씨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가 민간단체로 자리를 옮기려 하자 그 단체의 노조측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우리 단체가 상공부 양로원이냐"는 식으로. 상공부 현역들은 대안으로
이 단체의 신설 자회사 상임감사자리를 분양해줬다.

그러나 H씨는 뒤늦게나마 "진가"를 인정받아 당초 넘보던 그 단체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 직급도 한등급 얹은 전무로.

이렇게 자신의 "능력발휘"를 통해 예비역을 현역시절보다 더 화려하게
장식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친정에서 돌봐주는 것은 길어야 퇴직후 6년이다. 그 이후 이곳저곳으로
자리를 옮겨다닐 수있다면 그건 개인의 노력이 뒷받침된 홀로서기로
봐야한다"(재무부 Y국장)는 얘기도 있다.

재무부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한 뒤 모국제금융기관의 부총재를 지낸 J씨.
그가 새로 몸담은 이 국제기관의 "직속상관"인 총재가 일본의 "일개
은행장출신"이라서 구설수에 올랐었다.

"적어도 총재는 해야지 부총재가 뭐냐"는 후배들의 불만에 대한 그의
변이 재미있다. "50대 중반에 현역에서 은퇴하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는 건 문제다".

J씨는 지금도 홍콩의 조그마한 중국계 금융기관 사장으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J씨의 경우에서 보듯 "낙하산 종자분양"이 예전같지
않다. 그만큼 예비역들의 "홀로서기"에 대한 절실함도 높아지고 있다.

산하기관이나 단체의 "내부 선수층"이 두터워지면서 낙하산으로 뚫고
들어갈 틈도 좁아졌다.

여기에 관료출신의 "함량"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제너럴리스트"인 관료들이 "스페셜리스트"를 요구하는 산하기관에
가서 제몫을 다하기 어렵게 됐다.

예전엔 현역들과의 연줄을 활용해 "로비 일손"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지만
요샌 그런 상품가치도 떨어지고있지 않은가"(재무부 J과장)는 진단이다.

예비역-. 과거 우리경제의 개발주도경험을 바탕으로 퇴직후에도 "역할"과
"자리"가 보장됐던 그들에게 "시대변화"란 말만큼 짙게 느껴지는 말도
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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