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업체인 보진제는 지난 8월15일 창립82주년을 맞았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민족자본에 의해 처음 설립된 이회사는 4대째 가업을
이어오며 100년역사에 도전하고 있다.

1백년역사에 근접해 도전장을 내는 기업도 드물며 4대째 대를 이어 사업을
하는 공장을 찾아보긴 더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창업자 자운 김진환사장(1874~1938)에 의해 닻이 올라간 보진재는 2대인
김낙훈사장(1894~1971)과 3대인 김준기회장(72)을 거쳐 현재는 김정선사장
(43)이 4대째 배턴을 이어오고 있다.

창업당시 졸업장이나 상장등을 석판에서 뽑아내던게 고작이던 이회사는
이젠 첨단인쇄설비를 갖추고 검인정교과서 성서 상업인쇄물 잡지류등을
찍어내고 있다.

외형은 1백억원규모.

외형의 25%정도는 중동지역의 교과서 성서등을 인쇄, 수출에 이바지한다.

보진재는 처음엔 미술전문인쇄소로 출범했다.

창업자 자운은 당대 서화단의 대표자 안중식의 문하생으로 글과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대한제국 학부(지금의 교육부)에서 국립교육학회교관(서기관)을
지내며 교과서편찬업무를 담당했던 인물.

그러던 그가 한일합방 2년후인 1912년 서울 종로1가85번지에 "보진재"란
간판을 걸었다.

수동식 석판기3대와 6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보진재는 매일신보에 광고를
낸다.

"석판 동판 미술인쇄개업. 본인이 누년을 문아당인쇄소에서 서화를
전하다가 이번에 석판인쇄소를 개업하고 정밀히 신속히 수응하니 연속 주문
하시기 바랍니다. 개업기념으로 일삭(보름)이내에는 인쇄비를 할인해
드립니다. 보진재석판인쇄소주인 김진환백"

보진재가 지난 82년 발간한 "보진재70년사"에 실린 광고문안이다.

개업전에 서너차례 나간 광고에 힘입어 인쇄소는 늘 만원이었다.

보진재는 "조광" "신여성"등 잡지의 표지나 포스터등을 찍었으며 원고가
친일일색이든지, 미풍양속을 해치는 경우 인쇄수주를 하지 않아 "인쇄업계의
민족학교"란 소리도 들었다.

2대인 낙훈사장은 보성중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려했으나 부친의 뜻을 거역
할수는 없었다.

그는 국회의장을 지낸 이기붕씨와 보성중동기동창으로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인쇄소에 취직, 대를 이을 준비를 했다.

낙훈사장은 창업주와 함께 실질적으로 회사를 반석에 올려 놓았다.

그는 20년 사옥을 관철동으로 이전시켰으며 24년에는 민간기업으론 처음
한시간에 8천~1만장을 인쇄할수 있는 오프셋인쇄기를 들여와 대량인쇄시대를
열었다.

3대 김준기회장은 서울대공대 화학공학과 출신으로 부산피난시절인 52년
사장에 취임한다.

둘째인 그는 대학을 졸업한뒤 덕성여대강사를 하며 대학교수의 꿈을 키워
왔으나 부친의 뜻에 따라 인쇄소일을 맡게 된다.

피난통에 대권을 물려받은 준기회장은 어렵사리 피난시절을 헤쳐난뒤 56년
서울 용산구 용문동으로 사옥을 이전한다.

이와함께 자동식 고속인쇄기와 제판시설을 도입, 회사를 한단계 발전시킬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다.

4대 김정선사장은 대우자동차 부장출신으로 부친의 부름으로 지난 92년부터
대를 잇게 됐다.

서울대 응용수학과 출신인 김사장은 부친과 같이 둘째아들이면서도 보진재
"대물림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4대째 가업을 이어올수 있었던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주위에선 김씨집안의 욕심없음을 들고 있다.

김회장도 "집안대대로 분에 맞게 살라"는 얘기를 듣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보진재가 5대, 6대째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선 상속세법의 개정을 통한
대물림의 뒷받침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궁 덕기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