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법국이라는 말을 쓴 전령서라는 그
문서에 대해서 따져야 되지 않습니까. 반드시 사과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수교고 뭐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사과를 받아
내려다가 자칫하면 대원군과 충돌을 하게 된다 그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내가 사신으로 가려는 거 아니오"

"사이고 도노가 가시면 충돌 없이 사과를 받아낼 자신이 있습니까?"

"있고 말고요. 사과도 받아내고, 수교의 길도 틀 자신이 있소. 대원군의
콧대를 내가 납작하게 만들어 놓을테니 보구려. 허허허..."

사이고가 웃자 오쿠마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잠시 말없이 걷다가 오쿠마는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사이고 도노, 저...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요?"

"사이고 도노가 가시든 다른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든 좌우간 그 문제도
출병 못지 않게 중요한 터이니, 구미사절단이 돌아온 다음에 정식으로
논의를 해서 결정하는게..."

"뭐라구요? 그걸 말이라고 하오?"

벌컥 그만 사이고는 화를 내듯 내뱉었다.

오쿠마는 약간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는 뭐 바지저고린가요? 구미사절로 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국사를 집행도 못하게..."

필두가로인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은 말이어서 평소에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는 사이고가 얼굴이 벌개지고 있었다.

"그런 뜻에서 한 말이 아니라, 워낙 중대한 문제라서 같은 값에 각료
전원이 참석한 자리에서 결정했으면 싶어 그저 말씀드려본 것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음... 아!"

사이고는 갑자기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걸음을 비틀거렸다.

핑 현기증이 왔던 것이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오쿠마가 얼른 다가들어 사이고를 부축했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애써 정신을 가다듬은 사이고는,

"괜찮아요. 내가 화를 내는 바람에 그런 것 같소. 미안하오"

하고 다시 뚜벅뚜벅 걸음을 떼놓았다.

그날 좀 일찍 퇴청을 하여 사이고는 호프먼을 찾아갔다.

진찰을 해보고 나서 호프먼은 말했다.

"많이 좋아졌는데요"

"아, 그래요? 그럼 이제 여행을 해도 되겠군요"

사이고는 오늘 잠시 현기증이 있었다는 말은 입밖에 내질 않고, 엉뚱하게
여행 얘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