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명치연호로는 6년6월12일이었다. 그러니까 구미사절단이
오스트리아에서 만국박람회를 관람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 아침
사이고 다카모리는 동생인 스쿠미치의 집을 나섰다.

"형님,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내가 뭐 병잔가?"

"그래도 걸어서 가시려면"

"언제는 걸어다니지 않았나. 내가 말타는 것을 본 일이 있어?"

형제는 서로 마주보며 히죽 웃음을 나누었다. 사이고는 말을 타는 일이
없었다. 몸집이 장대하고 비만해서 말에 올라타면 말등이 휘어지기라도
할까 싶은지 도무지 승마에는 관심이 없었다.

육군대장에 근위도독(근위병 총사령관), 그리고 필두참의라는 막강한
권력을 한몸에 지닌 실권자이면서도 늘 걸어다녔다. 심지어 메이지천황이
근위병들을 열병할때도 총사령관이라는 사람이 백마를 탄 천황의 뒤를
터벅터벅 걸어서 따랐다.

등청을 할때 역시 도보였다. 보좌관이 거의 도시락을 들고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사이고는 유신을 장악한 신정부의 수뇌부가 다투어 큰집을 마련하고 첩을
거느리며 호화와 사치의 길로 빠져들어 거들먹거리는 꼴들이 싫었다.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것이 마치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행세하다니 돼먹지 않았다 싶었다. 그래서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
한번 더 새로운 유신을 단행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의 좌우명은 경천애인이었고, 정치가로서의 몸가짐을 청명에 두며
"자손을 위해 미전을 마련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구처럼 곧잘 입에
담았다.

그런 사람인지라, 집권층의 부패와 사치에 대한 무언의 경고로 혹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등청을 할때 말도 가교도 타지 않았고
도시락을 지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이고는 그 무렵 건강이 좋지않아 동생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의 건강을 염려한 것은 천황이었다.

하루는 천황이 사이고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천황이 몸소 신하를 찾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사이고는 놀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저를 부르시지 않고 몸소 찾아오시다니 황송하옵니다"

"아니오. 자리에 앉아요. 다름이 아니라 내가 사이고공의 건강이
염려되어 찾아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