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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지난 6월2일 한국정부에 전달한 문건은 49년1월부터 53년8월
까지의 한국전쟁에 관한 기본문헌자료 1백건 2백79쪽과 보충문헌자료
1백16건 2백69쪽이다.

외무부가 20일 공개한 문서는 한국전문서요지와 이를 토대로 작성한
한국전 내용구성등 일부 내용이다. 한국전내용구성을 요약,정리한다.

< 편 집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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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49년 3월5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에 의한 조선통일에 관해 소련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했다.

스탈린은 이에대해 북한군이 남한군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김일성은 4월28일 쉬티코프대사에게 한반도의 상황변화에 따라 북한군의
무력및 기술강화가 필요하다는 스탈린앞 서한을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쉬티코프대사는 5월3일 김일성의 서한을 모스크바에 송부하면서 김일성의
요구를 지지한다는 메모를 첨부했다.

북한군 정치국장인 김 일은 5월 중국방문기간중 모택동과 한반도의 상황
에 대해 상세히 논의했다. 중국지도부는 김일성이 어느 순간에도 기습전
이든 지구전이든 수행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택동은 지구전이 되는 경우에도 이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으며 최악의
경우 북한을 돕기 위해 중공군을 파견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소련정부는 6월4일 김일성이 요청한 무기와 군사기술을 제공하는데 동의
함을 통보했고 북한은 지원의 댓가고 소련에 정미된 쌀 3만t을 공급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김일성은 8월14일 재차 대남공격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이를위해 인민군에
대한 소련의 기술과 무기의 추가지원및 2-3개 무기체계의 구입필요성을
강조했으나 소련측은 좀 더 자세한 가능성과 전체상황을 파악한 후 행동을
취할 것을 권고했다.

9월에 들어 김일성은 남한공격에 대한 구체적 제안으로 옹진에 주둔중인
남한군 2개연대를 공격, 교두보를 마련하고 상황에 따라 후속조치를 결정
하며 남한군의 사기가 저하될 경우 대남공격을 지속하고 반대의 경우
확보된 점령지 경계강화와 남북경계선의 3분의 1단축방안을 제시했다.

소련은 이에대해 미국의 지원가능성과 남한주민들이 부정적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 반대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9월24일
현재의 상황이 대남공격에 있어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지침을
하달했다.

김일성은 12월29일 모스크바에 메시지를 보내 50년중 1억2천만루불상당의
무기를 원조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 댓가고 비철금속을 공급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스탈린은 50년1월 김일성에 전문을 보내 북한지도자는 남한문제실현을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만나서 이 문제에 관한
논의를 할 것과 지원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2월에는 모스크바로부터 북한군 3개보병사단의 추가 창설과 51년분
차관의 50년 사용에 동의한다는 통보가 전달됐다.

김일성과 스탈린간의 4월 모스크바회담에서 스탈린은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하면서도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일성과 스탈린은 이 문제에 대한 중구측의 의견이 부정적일 경우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이 문제의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김일성은 모택동과 면담하기 위해 5월13일 북경에 도착했다. 이 회담에서
김일성은 6월경으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지시했다고 말했다.

모택동은 이 회담에서 한국통일은 무력통일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같은 작은 나라때문에 3차대저늘 시작하지는 않을 것인만큼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일본군이
남한내 분쟁에 개입할 가능성에 주의를 환기했다.

김일성은 북한군에게 6월까지 완벽한 전투태세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그 이유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고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6월22일 북한주재 소련대사관에 암호전문의 해독은 바람직하지 못한만큼
향후 일체의 암호전문을 해독하지 말라는 모스크바의 지시가 하달됐고
이후 50년말까지 평양와 소련외무성간에는 전보 교신이 중단되었다.

로신중국주재 소련대사는 7월2일 주은래와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주은래는 만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다면 중공군은 북한군으로
가장,미군에 대항,전투에 참가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중국지도부는 이미
묵덴지역에 12만에 이르는 3개군병력을 집결시켜 놓았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5일 북경대사관에 보낸 전문에서 중조국경에 중국군 9개사단을
즉시 집결시키는 중국의 대책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하고 소련은
이를 항공대로서 엄호할 것임을 언급했다.

모택동은 8월과 9월사이에 두차례에 걸쳐 북한정부대표를 접견, 상황
전개에 대해 협의했다.

모는 이자리에서 장기전가능성을 예고하고 충분한 예비전력확보와 인천-
서울, 진남포-평양지역의 방어선 경계문제에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경고했다.

9월21일 유소기는 중소친선협회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동향을 설명하면서
중국공산당지도부는 만약에 북한이 미국에 패배할 지경에 빠지면 어쩔 수
없이 북한의 동지들을 도와야 할 것으로 각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실예프스키 소련국방장관은 9월23일 미공군의 평양공습을 막기 위해
연해주로부터 전투기연대를 전진 배치시키는 대책을 준비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평양에는 10월1,2일 양일간 투입,3일부터 행동을 개시하도록
되어있다.

스탈린은 10월1일 모택동에게 전문을 보내 중국의용군을 빨리 5-6개
사단이라도 38선에 진출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중국은 당분간
지켜보자는 답전을 보냈다. 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국지도부는 10월중순 한국전 참전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주은래는
반대했으나 팽덕회등이 강하게 주장,모택동에게 즉각적인 파병을 공동
건의키로 합의했다.

모택동은 10월24일 개최된 회의에서 조선을 중국의 문턱으로 간주한다고
말하고 중국에 심각한 안보위협을 야기할 미국의 조선장악을 용인할 수
없다고 분명히 했다.

스탈린은 12월7일 중국에 대해 유엔과 미국의 한반도 전투행위중지조건을
조속히 알고자 한다는 방향으로 대응할 것을 권고했다.

모택동은 51년6월 스탈린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미국이 교전당사국간
휴전회담개최를 제의해 왔다고 통보하고 개성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스탈린은 이에대해 북한군과 중공군이 회담대표로 참석할 것과 소련
대신에 중국이 주도권을 갖고 협상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소련은 53년 7월24일 휴전협정서명에 김일성대신 북한부수상과 중국의
팽덕회가 참석하도록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