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11월 한국종합무역센터 설계가 국제 지명경쟁에 부쳐졌다.

이 현상설계에는 총 8개팀이 응모했으나 심사결과 일본의 니켄 세케이
팀의 작품이 최우수작, 우리나라의 원도시건축과 정림건축 작품이 가작으로
각각 선정됐다.

이에따라 원도시건축과 정림건축으로 구성된 국내 컨소시엄이 니켄 세케이
와 협력, "협동설계"를 하는 쪽으로 결말이 났다.

이들 세팀은 85년 1월부터 86년말까지 현상공모작품을 바탕으로 설계를
실시, 지금의 무역센터 건물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당시 무역센터 건물설계에서 현상공모는 말뿐이었다는 소문이
건축설계업계에서 끊임없이 떠돌았다.

당초부터 디자인, 즉 계획설계는 외국팀의 작품을 선택하고, 노역에 가까운
실시설계는 국내팀에 맡기는 것을 원칙으로 기획됐다는 것이었다.

진상이야 어떻든 우리나라 대외무역을 상징하는 건물인 무역센터의 설계는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외국 설계사와 "협력"한 사례는 비단 무역센터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대한생명빌딩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SOM사와
박건축이 공동설계했다.

삼성그룹의 동방생명빌딩과 중앙일보신사옥은 미국의 베케트와 삼우
설계가, 대한교육보험 본점 건물도 미국의 시저 펠리와 엄이건축이 각각
설계를 맡았다.

이밖에 럭키금성 트윈빌딩(미국 시카고 SOM사,창조건축,박건축) 잠실롯데
월드(일본의 기쇼 구로카와사,예종합건축) 롯데호텔신관(일본의 도다
겐세스사,삼풍,동서건축) 국제빌딩(미국 CRS사,국제종합엔지니어링,동해
건축) 포항제철 경영정보센터(니켄 세케이사,세마건축,간삼건축)등 서울의
대표적 건축물들은 대부분 외국 설계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설계가
이루어졌다.

심지어 정부제1종합청사같은 관공서 건물도 미국의 PEA사가 설계를 담당
했다.

이들 건축물은 겉으로는 외국과 우리나라 설계회사간의 "협력"을 통해
설계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 협력이라는데 문제가 있다고 건축설계업계 관계자들
은 한결같이 지적한다.

건물 디자인및 주요시스템 결정등 실제 설계에 해당하는 핵심 부분은 거의
외국 설계회사가 맡고 우리 설계회사는 자료제공및 건축허가등 부수적 일들
을 대행하는데 그쳤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대표적 건물들에 대한 설계가 대부분 외국 설계회사들에
돌아간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 건축설계업체들의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일차적이유가
있다.

그래서 큰 건물을 지으려는 건축주들은 경험많은 외국의 대형설계업체들을
선호한다.

특히 수백억원에서부터 수천억원의 자금이 들어가는 대형건물의 경우
건축주들은 경험이 부족한 국내 업체들에 설계를 맡기는 위험부담을 안기를
꺼리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우리 건축설계업체들도 이젠 고도의 설계기술이 요구되는 건축물을
설계할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는 주장도 나오고는 있다.

실제로 중견 건축가인 류춘수씨(종합건축사사무소 이공 대표)는 최근 중국
최고층건물(86층) 국제 현상설계에서 당선되는 실력을과시했다.

또 일부 대형설계업체들은 동남아지역에 진출해 있고 삼우종합건축사
사무소는 해외사업팀을 별도로 구성, 전략적으로 해외시장개척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건축설계업계 전체를 놓고 볼때 극히 일부에 국한된
얘기일 뿐이다.

대부분의 국내업체들은 아직도 영세한 자본과 열악한 조건속에서 외국의
설계사례를 참고하거나 베끼는 모방설계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대한건축사협회가 집계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건축설계업계의 영세성이
한눈에 드러난다.

93년 9월말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중인 건축사는 4천1백49명, 개설된
건축사사무소는 2천5백98개소에 이른다.

일본의 건축사 21만7천여명, 건축사사무소 6만8천66개소(89년말 현재)와
비교할때 수적으로만 따져봐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

게다가 국내 사무소중에는 단독사무소가 1천9백46개소로 전체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단독사무소는 거의가 10인 이하의 건축사보조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사무소들이다.

이들 소규모 사무소들중 태반은 구청부근에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놓고
소형건물이나 주택건물 설계에 매달리고 있다.

3명 이상의 건축사를 확보한 경우에만 허가를 내주는 종합설계사무소는
6백38개소이다.

종합건축사사무소는 단순히 수적 비율로 볼때 전체의 25%에 이르지만
종합사무소의 상당수는 소속 건축사가 개별적으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어
실제로는 단독사무소나 다름없는 실정이다.

직원이 1백명을 넘고 조직적으로 운영되는 종합설계사무소는 불과 수십개
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건축설계업계의 후진성은 설계도서 내용에서도 드러난다.

85~92년 건축사협회에 신고된 설계도서 현황을 보면 전체 설계물량가운데
주택설계가 차지하는 비율이 52%이며 이중에 아파트 설계의 비율이 64.7%에
이른다.

또 근린생활시설과 공장설계도 각각 17.4%와 11.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업무시설(5.7%) 교육연구시설(2.9%) 숙박시설(1.8%) 종교시설(0.9%)
등은 전체 설계도서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이 5%내외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 건축설계도서의 대부분이 별다른 창의력없이 일반제품처럼
"생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 건축설계업계에 부정적 측면만 있는건 아니다. 60~70년대와
비교해 볼때 설계사무소들이 규모나 전문성면에서 어느정도 "발전"한게
사실이다.

영종도 신공항 여객터미널은 우리 건축설계업계의 "발전"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 꼽힌다.

영종도 여객터미널 설계는 유신설계공단과 미국의 벡텔이 마련한 마스터
플랜을 토대로 92년 4월 공고됐다.

이 설계경기에는 총 15개팀이 지명신청을 했으나 우리의 BHJW(범,희림,
정림,원도시건축)컨소시엄과 미국의 C.W FENTRESS AND J.H BRADBURN
MCLIER사의 공동작품이 당선돼 기본설계계약을 추진하게 됐다.

발주처는 다양한 논의를 거쳐 국내 BHJW컨소시엄과 주계약을 맺고
주계약자가 미국회사와 다시 계약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국내 설계팀이 외국 설계업체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게된 것이다.

정부종합청사 설계조차도 외국 업체들에 맡기고 우리 설계회사들을 형식적
협력업체로 끌고 들어가던 시절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사례이다.

건축설계업계에서는 현재 우리 건축설계업계가 발전하려면 국내 건축주들의
의식이 우선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 업체들도 충분히 설계할수 있는 건물도 외국업체에 넘겨주는 관행이
없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결국 국내 설계실력에 대한 건축주들의 불신이 팽배해 있고 그 불신으로
인해 국내업체들이 설계실력을 쌓을수 있는 기회조차도 갖지 못하는 악순환
의 고리를 효과적으로 끊는것이 우리 건축설계업계가 당면한 과제인 셈이다.

<이정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