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모토는 실은 구로다의 두번째 서찰을 받고는 소아를 버리고 대아의
길로 가기로, 즉 살아서 새로운 일본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을 돌렸었다.
그러니까 항복을 하기로 결심으로 한 것이었다.

어젯저녁에 기꺼이 구로다가 보낸 술을 자기가 먼저 마신 것도 그렇게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쓰다이라가 자기를 향해 화살을 쏘는 듯한 말을 여러 각료를
앞에서 서슴없이 늘어놓자 순간적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결이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던 것이다. 항복을 해서 부하들의 목숨을 구한다음
자기는 자결을 하는 것이 마치 대아의 길인 것처럼 말이다.

에소모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마쓰다이라는 더는 화살을 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각료들도 모두 침통하면서도 어딘지 숙연한 그런 표정을
아무말이 없었다.

"내 말에 이의가 있는 분은 말해보오"

아무도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럼 항복을 하는 걸로 결정이 되었소. 나는 갑니다"

에노모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기되었떤 얼굴에서 어느덧 핏기가 싹 가시어 새하얀 안색의 에노모토는
회의실에서 나가 성큼성큼 자기방으로 향했다. 그의 거실은 회의실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었다.

에노모토가 사라진 다음에도 각료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질
않았다. 모두가 맥이 탁 풀려버린 것처럼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총재님! 안됩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고함소리가 에노모토의 거실쪽에서 들려왔다.

대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수가 있어서 아라이와 오오도리가 놀라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뛰어갔다. 몇몇 각료들도 일어나 슬금
슬금 뒤따라가 보았다.

단검을 빼들고 앉아있는 에노모토에게 오쓰카 보좌관이 달려들어 그
단검을 빼앗으려고 실랑이들 하고있는 중이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에노모토는 곧바로 셋푸쿠를 하려고 자리를 잡고앉아 배를 까내놓고서 칼을
빼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때 오쓰카가 들어섰던 것이다.

"이러지 마세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싸워서 죽는게 떳떳하지 뭡니까"

오오도리도 다가들어 말렸고, 아리오도 "이미 항복을 하기로 결의를 했으니
같이 행동을 해서 부하들의 목숨을 끝까지 보살피는게 도리가 아닙니까?
안그렇습니까?"

하고 애원을 하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