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1~2년안에 연구소를 그만둘 생각이 있습니까"

국내 어느 민간경제연구소가 올초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결과를 보고 소장이하 전직원이 깜짝 놀랐다. "그만둘 것"이라는 사람이
28%나 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에 물이 한참 오를 선임연구원(일반기업의
과장급)들은 35%가 "때려치겠다"고 했다.

연구소가 발칵 뒤집힌건 물론이지만 "그렇게 나올줄 알았어"라는 냉소적
반응도 적지않았다.

연구소에 근무한다고 하면 흔히들 "좋으시겠습니다"한다. "보수도
괜찮은데다 공부할 수 있는 직장이니 더 바랄게 뭐 있는냐"는 식이다.
그러나 정작 연구원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연구소를
"정착의 땅"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 왜일까.

"증시가 활황이면 조직을 늘리거나 인원을 보강하고 증시가 시원치 않을
땐 어림없이 조직축소 얘기가 나온다.

이런 현실에서 무슨 평생직장이냐" 증권사 계열인 J경제연구소에 근무하는
K연구원의 푸념이다.

증시상황에 따라 조직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하니 어떻게 마음잡고
연구할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이런 탓에 증권분석쪽에서 일하는 연구원은
여차하면 모회사인 증권사로 "튈"생각만 한다.

복지.후생면에서도 낫거니와 증권사는 라인조직이어서 무엇보다 자리에
대한 불안이 없다. 실제로 모연구소의 경우 지난해 부서당 평균2~3명이
증권사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노하우가 쌓일수 없는건 당연하다. 연구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평가를 제대로 못받는 것도 불만요인이다.

연구평가가 공정하고 객관적인 틀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민간경제연구소가 아직도 직급별 연공서열을 중시하고 있다.
연구소의 특수성을 감안한 고유한 평가체계가 미흡한건 물론이다.
그러다보니 연구원들은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

연구원을 슬프게하는 것은 또 있다.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거다. 능력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꽤나
역설적인 얘기이나 모연구소 H연구원의 어떤 하루를 보면 미루어 짐작이
간다.

<>오전7시-출근과 동시에 신문읽기. <>7시30분-소장 외부강연원고 준비.
<>오후1시-계열기업 사장의 신문기고문 작성위한 자료정리. <>3시-
관계사가 요청한 "유럽연합(EU)의 대한GSP중단" 자료정리. <>5시-
선임연구원의 대학원과제 협조.

물론 매일 이런건 아니다.

그러나 잡무로 하루를 이렇게 허송하는 날이 적지않다. 이 연구원은 꽤나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엘리트다. 그래서 더욱 "위"의 특별지시가 많다.
윗사람들의 일을 대신 하다보니 연구에 전념할 시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여기서 "본말전도"현상이 생긴다. 어느 직장이나 그렇지만 연구원들은
처음엔 부푼 가슴으로 연구소에 들어간다. "나도 이코노미스트가 된다"는
꿈을 간직한 채. 그러나 이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1-2년만 연구소에 근무하다 보면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나 하는 생각이
문뜩 든다"(H연 L연구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온 고급인력들이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다는 얘기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현실에선 연구원이 제대로 길러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연구원이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중후장대한 지식"
(도쿠다 히로미 일노무라연 고문)인데 이것이 날이 갈수록 경박단소화
된다는 말이다.

물론 민간연의 여건은 그래도 국책연보다 낫다. 연구원들 자신도 인정
하고 있다. 월급도 많을뿐더러 석.박사를 굳이 가리지 않는 풍토가 엄격한
위계질서로 답답한 국책연보다는 좋다는 얘기다.

게다가 정부정책의 홍보논리나 앵무새처럼 말해야 하는 그들보다는 보다
자유롭다고도 말한다. 최근들어 국책연에서 민간연으로 가히 "탈출러쉬"
라고 할 정도로 번지고 있는 연구원 이동이 이를 반증하기도 한다.

"내가 근무하던 국책연보다 보수는 정확히 두배, 업무량은 1.5배쯤 된다"
산업연구원(KIET)에 근무하다 민간연으로 자리를 옮긴 한 연구원의 말이다.

과거 국책연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던 민간연들이 이제는 겨뤄볼만하다고
자신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렇다고 민간연의 숙제가 작아지는건 아니다. "연구원들의 가장 큰
불만은 장래에 대한 회사측의 비젼제시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미래상이 불확실한데 누가 열심히 연구하려 들겠는가. 이런 상황
에선 제대로 된 연구결과가 나올수 없다"(럭금연 이윤호대표이사).

이대표는 또 "연구원들도 연구소가 잠깐 거쳐가는 정거장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정보화 지식사회의 첨병이란 자긍심을 갖고
전문가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된다. 창의적인 지식상품을 만들어
내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결국 연구소를 만든 모기업은 연구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하고 그들의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될수 있는 연구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연구원들의 프로의식도 중요하다.

한국 최고의 이코노미스트가 된다는 자부심을 갖고 그에 따른 고통은
감수할 각오가 돼있어야 한다. 그래야 연구소도 연구원도 도약의 나래를
펼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