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다가 충족이 안되면 그 때의 실망은 엄청나게 큰 법이다. 지금
나라안팎에선 컸던 기대와 큰 실망들이 교차하고 있다. 중국의 개방화에서
시작돼 구소련과 동구권의 궤멸로 이어진 냉전체제 붕괴는 "이 지구위에
전쟁은 다시 없다"는 벅찬 희망을 인류에게 심어 주었었다. 그러나 그뒤
작고 큰 유혈 전쟁들이 지구 곳곳에서 줄지어 벌어져 평화에의 기대를
산산조각내고 있다.

그러나 찬찬히 따져 보면 인류역사에 개량이나 진보는 있어도 단절이나
비약은 없다. 전쟁은 인간이 사는 한 그치지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불가피한 전쟁도 물론 있겠으나 어찌보면 타인을 무한히 지배하고자 하는
소수인의 허영심이 전쟁을 조작해낸 경우도 많을성 싶다. 앞으로 국지전외에
문화권이나 피부색간의 대규모 총돌을 우려하는 학자도 있다.

각국의 국내정치는 어떤가. 눈을 씻고 들여다 봐도 어느 하나 정치가 잘돼
행복해 죽겠다는 나라는 없다. 민주주의의 쇼윈도처럼 착각되는 미국도, 그
발상지라는 유럽 각국도 온통 불안과 반대가 들끓고 있다. 80년대 까지
경제우등생에 정치도 그만하다고 선망되던 일본마저 요 몇년에는 죽을 쑤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문민정부의 출범이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열화같은
기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곧 민주주의가 활짝 꽃피고 세상에 억울한
사람없는 밝은 사회가 오리라고 개대했었다. 그러나 1년 남짓한 사이에
실망의 숨결이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다. 조금 더 지켜보면 훨씬 나아진다
든가, 다 그저 그런거라든가, 아니면 아예 기대할게 없다는 등의 긍정-
회색-부정으로 의견이 엇갈리는 듯이 보인다.

최근에는 집권층도 이같은 민심의 동향을 외면하지 않고 대안모색에
열중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직 당국이 늦으나마 농안법파동의
이면을 파헤치고 있고, 금주중 청와대에서 민정관계회의가 소집되리라는
소식 또한 그같은 움직임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비판의 소리를 음해의
소산이라고 일축하는 피해적 심리상태와, 이를 주의깊게 듣고 살피려는
능동자세와의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렇다. 국민도 집권층도 깊이 생각하고 정말로 발상을 바꿔야만 이 나라
정치가 한단계의 향상을 도모할수 있다. 돌이켜 보면 입헌 대의정치의
46년 역사가 결코 짧다고만 할수 없지만 그 가운데 전진의 역사보다 퇴보의
역사가 길었다. 민주주의 퇴보의 역사는 사회에 긍정아닌 부정, 신뢰아닌
불신을 쌓아 올렸다. 또한 그것은 협조와 인내대신에 반발과 조급의 국민성
을 만들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집권층이건 국민이건 철저한 과거의
반성에서 출발하고 앞을 내다봐야 한다.

무엇보다 조급성에 대한 반성이다. 자유당시대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커녕 해방과 독립의 의미조차 정리하지 못한채 전쟁과 결핍속에 기초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초조가 조급성을 낳았다. 민주당시대는 한점의 인내도 없는
자유에의 강렬한 욕구가 방종으로 추락하여 역사의 단절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뒤의 개발 군사독재 30년은 강요된 인내였다. 그것이 자발적 인내로
성숙하고 신뢰풍토 조성으로 이어지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치자.
그러나 93년 새정부의 출범에 즈음한 기대의 봇물이 또다시 인내부족과
조급성을 떠올려 모처럼의 기회를 다시 망쳐서야 되겠는가.

거기에는 정치의 책임도 크다. 선거에 이기는 일이 중요하기는 했겠지만
너무 많은 공약을 남발하여 만능처럼 믿게 기대를 부풀린 무책임을 부인해선
안된다. 이제부터라도 위정자는 이행할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말고 이미
내세운 공약 가운데도 실현 불가능한것, 큰 무리가 따르는것은 과감하게
국민에게 현실을 설명하여 협조를 구해야 한다.

공직사회의 이른바 복지부동만 해도 그렇다. 표현은 달라 "무사안일"로도
불렸지만 일안하고 눈치만 보는게 어제오늘 처음생긴 현상은 아니다.
공무원도 공무원이기 이전에 국민이고 사람이다.

어느때나 잘된 점에 대한 칭찬이나 보상보다 잘못된 부분만 노출시켜
책임추궁당하고 목 날아가는 풍토에서는 되도록 일하는걸 손해로 알았었다.
게다가 처우가 상대적으로 박하다고 느껴질땐 더욱 그랬다.

우리는 김대통령정부가 역대 어느정권보다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을만
하다는데 조금도 이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부가 만능정부는 아니라
는 점을 일깨우고 싶다. 이 점을 국민도 알아야 하고 집권층 스스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출범한지 이미 1년여가 지났고 4년이 좀 못남았다. 따라서
국민이나 정부가 조바심할수도 있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다. 시행착오만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충분히 있다.

집권자가 너무많은 일욕심을 내서도, 국민이 너무 많은 요구를 해서도
안된다. 앞으로 4년동안에 완전히 끝낼수 있는 일, 중간쯤만 해낼 일,
계획만 세울일, 기초정도만 닦을 일들이 각각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뒷일은 국민이 뽑을 다음 정권에 넘겨야 한다. 가장 상식적인 얘기지만
상식을 자주 잊어먹는 것이 인간의 약점임을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