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와 삼전도 일대는 예부터 삼남.동북지방의 농산물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던 탓으로 시장이 발달했고 이지역을 중심으로 서울 도매상들의
강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송파장터에서는 명목상 한달에 여섯번 장이 선다지만 실제로 서울 시전
이 파는 상품과 같은 것을 마을 안에 쌓아 두고 매일 매매하였으므로 서울
시전상인들이 이 때문에 해마다 이득을 잃어 가는 실정이다"

"비변사등록" 영조31년(1755)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이미 18세기 중반
부터 송파장터는 상설시장이화 되어가고 그곳 상인들의 상권이 조정에서
인정한 서울시전 상인들보다 커져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무렵 송파장터의 상권을 쥐고 흔들었던 손도강이란 상인이 있었다.
거간으로 시작, 서울의 갑부가 된 인물이다. 그는 양주와 광주의 부자들
에게 자금을 조달받아 직접 원산에 드나들며 조정에서 금지한 어물을
사들여다 넘겨팔았다.

어느날 어물 30바리를 송파장터로 운송해 오다가 길목을 지키고 있던
서울어전상인들에게 들켜 버리자 오히려 그들을 흠씬 두드려패 돌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뒤 1883년(순조33)에는 상인들의 농간으로 "쌀폭동"이 일어났다. 송파
장터와 함께 서울 상권을 좌지우지했던 한강변의 객주들이 쌀을 매점매석,
쌀값이 3배나 뛰었고 돈을 주고도 살수조차 없게되자 참다 못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반매점운동이었던 셈이다.

성난 군중은 시내의 싸전을 모조리 불사르고 한강변으로 몰려가 쌀을
쌓아놓은 객주들의 집 15채를 태워버렸다.

당시 조정은 폭동의 주모자 7명, 객주 1명, 싸전주인 1명의 목을 베어
사태를 겨우 수습했다. 이 "쌀폭동"의 배후에서 맹활약을 했던 사람들
역시 거간들이었다.

거간들은 시장부근에 점포를 열고 화물을 중개, 매매한뒤 수수료를
받았다.

곡물인 경우에는 1섬에 2~4전을 받고 잡화물이면 매주로부터 판매가격의
100분의1을 받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상인
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도매상의 역할을 겸했다. 중매인과 도매상 겸업의
역사는 이처럼 길다.

유서깊은 송파장터에 있는 가락동농수산물시장의 중매인들이 자신들의
도매행위를 급지한 "농안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어 시민만
골탕먹는 꼴이 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