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동을 며칠 앞두고 있는 재무부의 어느 국장은 여비서로부터 탁상
다이어리를 넘겨 받았다. 그 다이어리에는 금융기관과 업계인사들과의 식사
약속등에 관한 메모들이 깨알같이 남겨 있었다.

그는 탁상다이어리를 즉시 집으로 옮겨 불태워버렸다.

보사부 L국장은 약속메모를 비서에게 맡기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수첩에
적는다. "앞으론 절대 메모를 남기지말라"고 비서에게 "엄명"을 내려 놓은
것은 물론이다.

요즘 과천청사 고위관료들은 이렇게 자신의 메모지를 "2급비밀"쯤으로
다룬다. 무슨 엄청난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다.

딱히 책잡힐 잘못이 기록돼있는 것도 아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의
근거를 인멸하기 위한 것이다.

이같은 메모지관리는 새정부들면서부터 몰아친 사정이 낳은 결과다.
"메모지관리를 잘못한 탓에" 사정의 제물이 된 고위공직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정의 단서는 투서였고, 투서는 대부분 내부인의 소행이었고,
그 밑자료는 비서들의 메모였다고 과천사람들은 믿는다.

작년여름 비위혐의로 조사를 받았던 어느 고위공직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정기관에서 좀 보자고 하길래 만나봤죠. 그런데 그쪽에서 다짜고짜
"당신 몇월 며칠 몇시에 누구누구와 어디서 점심을 먹었다는데"라며 추궁을
시작합디다. 깜짝 놀랐죠. 나도 다 잊어버린 시간과 장소를 대는데는 귀신
곡할 노릇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여비서의 메모지를 본게 틀림없어요"
"누군가"는 내부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부하도 못믿겠더라"는 말이다. "상사에 대한 부하직원들의 존경
은 아득한 옛 이야기만 같다"(상공자원부 C국장) 부하로부터 꼬투리잡히지
않기 위해 몸조심해야 하는 풍토.

그것이 요즘 과천관가의 새로운 풍속도라면 풍속도다.

부하가 상관을 "고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우선은 관료조직의 자체정화작업이 추진돼온 사실과 연결시켜 볼 수있다.
구태를 못벗는 고위관료, 구체적으론 "술 잘먹고 고스톱잘치고 거기다
업계도 잘 주무르는" 그런 관료를 "정리"한다는 점에선 바람직한 측면도
많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어차피 치러야하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른다.
미국 프랑스 독일등 선진국관료사회에서 장려.고무되고 있는 "내부고발자
(whistle-blower)"의 제도화처럼 말이다.

70년대 미국정계를 뒤흔들었던 닉슨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도 따지고
보면 백악관내부의 익명제보(deep-throat)로 비화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최근 우리관료사회에서 번지고 있는 내부투서는 어떤가. 이런
서방형 내부고발로 볼 수있을까. 아무래도 그렇게 보기는 힘든 측면이 많다.

우선 투서의 목적자체가 본말을 전도시키고 있다. 본질적 문제를 파헤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새 정부의 개혁과 사정작업이 추진되는 동안 경제관료
사회에서 그 흔한 양심선언 한 번 없지 않은가. 고작해야 투서고 그 투서는
지엽말단적인 것에 불과하다. 극언하면 직속상사 흠집을 내는게 목적이다.

상사를 "도중하차"시켜 빈 자리가 나야 올라갈 수 있다는 입신의 방편
이었다고 보는게 옳다. 가장 엘리트로 꼽히는 경제관료들사이에
"아생연후에..."식의 투서문화가 고개를 들고 있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을 것같다.

과천에서 "용퇴하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작년이맘때
상공자원부 대회의실에서는 기상천외한 토론이 벌어졌다. 주제는 인사적체
해소방안. "경쟁력있는" 과장 한사람이 "이대로는 비전이 없다"며 사표를
제출해 파문이 일어난 직후였다. 토론이 열기를 더해가던중 한 사무관이
동석한 1급 고위간부들에게 "할만큼 했으니 당당하게 물러나라"고 다그쳤다.
순간 얼굴을 붉혔던 1급 한 사람이 며칠뒤 사표를 냈다. "선배를 내모는
풍토가 서글프다"는 말을 남기고.

개발연대 우리경제관료집단이 능률성을 발휘할 수있었던 요인중의 하나는
"유교적 가족주의"였다. "상하간에 철저한 신뢰를 바탕으로한 팀웍이 작동
했던데 있었다"(황성민한국행정연구원 수석연구원).

그러나 만성화조짐을 보이는 인사적체가 "때마침 불어닥친" 사정태풍까지
겹쳐 투서문화를 잉태한 셈이다. "유교전통의 와해"라고도 볼 수있다.
"달라진 시대상황의 산물"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 와중에서 지키고 가꿔야
할 미풍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료사회의 도덕률이 무너져가고 있다"
(안병영연세대교수.행정학)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이런 점에서 미행정학자 로널드 잉겔하트가 몇년전 미국정치학회보에
기고한 논문은 우리에게 시사하는바 크다.

"지난20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보인 10개나라중 다섯나라
는 한국 싱가포르 일본 대만등 유교권국가들이다. 이들의 경제적 성공은
유교적 전통을 업은 관료사회의 팀웍에 힘입었다. 그러나 이런 전통의 힘은
고도경제성장이 한풀 꺾이면서 차츰 쇠잔할 것이다. 그때에 어떻게 대비
하느냐가 새로운 도전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