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자기의 명품 아리타의 본향인 사가현 아리타마을에서는 매년
5월1일부터 5일까지 도자기축제가 열린다. 특히 4일에는 4백년전 이곳에
요를 개설, 일본 최초로 백자를 구어내기 시작한 조선인 이참평의 위업을
기리는 도조제를 도산신사에서 봉행한다. 아리타에서는 아참평이 이처럼
신격화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조국인 우리나라에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극히 최근인
지난 85년이었다. 일본측의 요청으로 이참평 고향찾기에 나선 한국도자기
전문학자들이 공주군 우포면 학봉리 일대가 그의 고향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아리타에서는 같은해에 도조 이참평공기념비 건설위원회를 발족
시켜 1억8천만원을 모금 한국도자기진흥협회와 함께 90년10월 계룡산국립
공원 입구인 공주가로공원에 "일본 자기시조 이참평공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최근 충남일원에서 이 기념비의 비문한 귀절이 문제가 되어
향토사가와 몇몇 사학자들이 비문교정위원회까지 결성해 떠들썩 하다는
소식이다.

"임진 정유의 난에 일본에 건너가."라는 귀절인데 "건너가"는 "꼴례가"나
"붙잡혀가"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일 우호관계를 유지한다는
미명으로 역사를 왜곡, 비의 주인공을 욕되게 하고 있으며 일본침략사를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다"고 이들은 비판하고 있다.

이문제에 대한 일본측의 입장도 만만치않다. 이참평가에 전해오는 고문서
에는 정유재난때 사가현 영주 나베시마가 조선땅에서 길을 잃고 헤맬때
이참평이 길을 안내했고 그가 뒤에 화를 입게될 것을 염려한 나베시마가
그를 설득하여 일본으로 데려왔다는 기록에 있고 "포로가 되어 잡혀왔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념비와 역사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같은 일본측의 입장이 전해지자 비문수정위측은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참평은 반역자이고 반역자의 기념비는 철거돼야 한다"고 극단적인 공박도
서슴치않고 있다.

끌려갔든 자의로 건너갔든 이참평은 일본자기의 시조가 되어 훌륭한 문화
전파자의 역할을 해낸 것만은 분명하다. 그를 반역자로까지 낙인 찍을 만한
정확한 사료도 없다. 일본측의 사료인 이참평가의 고문서라는 것도 그의
3대손이 기록한 2차사료에 지나지 않는다.

오는 4일 도조제에 참석하는 양국대표들이 다시 이 문제를 협의, 양국
국민의 선의로 건립된 이 기념비가 오히려 한.일문화교류의 장애물이 되는
불상사를 사전에 막아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