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만 해동화재해상보험 회장(86)은 경기도 장흥의 자택에서 서울 충정로
본사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한다. 회사에선 조회사를 직접 작성하는등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부지런할지어다"라는 계명을 성실히 실천한다.
그는 "스스로의 삶이 예술이 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가다듬는다"고
말한다. 넥타이 스웨터 색깔도 새빨간색을 즐기는 자칭 멋쟁이다. 지난
60년대중반 증권시장에서 해동화재 주식을 매입, 국내최초의 "장내M&A
(기업 매수합병)기록"을 갖고 있기도 한 김회장을 만나 보았다.

-백살이상 살아야 한다는게 인생관이라면서요.

<>김회장=인간의 자연수명은 1백30세정도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백살이상은 살고 죽어야 자연사라고 할수 있어요. 자연사는 가을에 단풍잎
이 바람에 날리는 것과 같이 아무런 고통없이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말합니다. 남들은 내가 오래 살았다고 할는지 모르나 나도 지금
죽으면 사고사에 불과합니다. 인생을 4계절로 치면 20세까지가 봄입니다.
40세까진 여름, 60세까진 가을이고 80세까지가 겨울이라고 할수 있지요.
이제 80을 넘겼으니까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봄을 맞고 있는 셈이지요.

-문제는 오래 사는게 아니라 건강하게 사는거겠지요.

<>김회장=물론입니다. 그러나 몸만 건강하고 체력만 좋다고 건강한게
아닙니다. 건강이라는 단어의 정의부터 분명하게 내려야 합니다. 진정한
건강이란 육신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양호한 상태를 뜻합니다. 문화적으로
나 경제적으로 사회에 봉사할수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건강한 삶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건강하게 장수하시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김회장=크게 두가지를 꼽을수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신자인만큼 우선
하나님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다음으론 식이요법과 일상생활을
중요시합니다. 나는 원래 "병백화점"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병약
했었습니다. 심장병 요통 심장판막폐쇄부전증 신경통 불면증 변비 위산과다
등 각종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했어요. 이 모든 질병을 물리친건 다름
아닌 식이요법이었습니다. 음식의 맛과 품질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먹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식이요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십니까.

<>김회장=매끼마다 영양의 밸런스를 맞춰 식사합니다. 주식으로는 보리빵
두유등을 들고 부식은 녹황색야채 감자 토마토 달걀 수박 오렌지 해조류
된장 땅콩버터 식물성기름을 먹습니다. 또 주식은 적게, 부식은 충분히
먹고 있지요. 식사량은 조금 더 먹었으면 하는 상태에서 숟가락을 놓습니다.

-그것 뿐입니까.

<>김회장=참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선 물과 공기 햇볕이 좋아야 합니다. 이
세가지가 건강에는 대전제조건입니다. 그중에서도 물(식수)이 가장 중요
합니다. 내가 장흥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이 3가지를 충족시키는 자연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업얘기 좀 하죠. 선친께선 고향인 전남 신안근처 무안군청에 취직
하라고 하셨다는데 굳이 실업인의 길을 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김회장=일제때였으니까 일본인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어요. 행복하게
살려면 경제도 무시할수 없었고. 뭐 사업이랄 것까지도 없지만 형님이 경영
하다 실패하고 던져 버린 수동식 국수기계 1대를 갖고 시작했습니다. 밀가루
2부대를 외상으로 들여와 국수를 뽑았지요. 그때 고생은 이루 말할수 없었
지만 2~3년이 지나니까 자리가 잡히더군요. 그래서 "의신상회"라는 밀가루
도매상을 차리게 됐지요. 그러다가 징용을 피하기위해 여수로 가 멸치잡이
를 했습니다. 그때 멸치잡이는 징용면제 대상이었어요. 왜냐고요. 멸치는
영양가가 높은 만큼 그때 군대부식으로 사용됐으니까 군수산업(멸치잡이)
을 하는 사람을 징용에 보낼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서울에는 언제 올라오셨습니까.

<>김회장=해방후입니다. 어장사업에 실패하고 돈이 없어서 석탄싣는
화물차를 타고 무작정 올라왔어요. 혜화국민학교 옆에 2평남짓한 가게를
얻어 동대문시장에서 야채와 젓갈을 받아다가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몇년
하니까 돈이 꽤 모입디다. 장사가 잘 되니까 주인집에서도 나와 똑같은
가게를 옆에 차렸는데 우리가게에만 손님이 들끓었지요. 내가 장사는 잘
했나봐요.

-회장께선 "증권왕"이란 별명도 갖고 계시죠.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증권투자를 한겁니까.

<>김회장=주식투자를 하게된 동기는 이래요. 6.25를 겪고 나니까 생계유지
조차 막막했어요. 생계유지를 위해서 증권을 한두주씩 사고 판거지요.

-증권얘길 하면 64년 해동화재 주식매매공방전이 유명하던데요.

<>김회장=증권계의 거물인 윤응상씨의 담보대체(요즈음의 대주에해당)
책동전으로 주가가 폭락세를 보이는등 증시가 위축된 때였습니다. 나와
김윤훈변호사는 그때 비밀리에 해동화재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윤씨계열의 해동화재주식 총1백만주중 92만5천주가 내손으로 들어왔고 매입
작전이 끝났을때는 8원짜리 주식값이 2백80원까지 뛰어올랐어요. 이과정에서
매도측에 가담했던 진화증권이 4천만원 서울증권 6천만원 한양증권이 8천
만원을 날렸다고 했지요.

-업계에서 비난도 많이 받으셨겠군요.

<>김회장=고발까지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장기영부총리가 밤11시에
나를 불러 화를 내면서 8원짜리 주식을 2백80원으로 올릴수 있느냐며 행정
조치로 해옥(쌍방합의로 매매가 없었던 일로하는 것)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한마디로 도박이라고 몰아붙이더군요. 그러나 나는 이렇게
따졌지요. 도박에도 룰은 있게 마련이라고요. 화투판에서 "가보" 잡은 사람
이 "따라지" 잡은 사람의 돈을 먹어야지 "따라지" 잡은 사람이 "가보" 잡은
사람의 돈을 먹을수는 없는 법 아니냐고 했지요. 장기영씨도 내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그후엔 사태수습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습니다.

-결국 당시의 해동화재주식매매공방전은 자본금 1억원짜리 회사의 전주식
을 1억8천만원에 매입함으로써 끝났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동화재를
인수한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습니까.

<>김회장=나는 그때 태양증권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엔 증권
을 도박이라고 보는 사회인식이 팽배해 있었죠. 나중에 아들들에게 "도박
회사"를 물려줄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프리미엄을 붙여 팔수도
있었던 태양증권의 면허권을 정부에 반납하고 보험회사를 인수한 거지요.

-어쨌든 40년넘게 보험인의 길을 걷고있는데 후회는 없습니까.

<>김회장=손해보험회사는 국제적으로 신사로 통합니다. 전세계의 보험사가
재보험거래를 통해 인류의 재산을 지켜주는 공공성이 강한 업종이기 때문
이지요. 보험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고 생각
합니다.

-보험이 인.지산업이라 그런지 회장님의 경영철학이 "기업은 사람"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김회장=여러가지 능력과 성격이나 개성을 가진 인간을 잘 맞추는게
경영입니다. 그래야 회사는 발전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인재를 발굴하고 잘 가르쳐서 적재적소에 배치, 그들의 능력을 결합시키면
기업은 발전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회장께선 깍쟁이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지 않습니까.

<>김회장=깍쟁이는 남의 것을 넘보지 않고 나의 것을 부정하게 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나는 60여년동안 사업을 하면서 단돈
1백원도 빌린 적이 없습니다. 빌려쓰지 않으려다보니 자본금의 3분의1만큼
은 항상 현금으로 갖고 있죠.

-내돈을 남에게 부정하게 주지 않았다는 말씀도 해주셔야죠.

<>김회장=과거 정권때 국회의원에 나오라는 요청을 받았지요. 그러나
거부했어요. 비례대표제로 나오라는 것이었는데 그게 바로 돈 내라는 것
아닙니까.

-뒤늦게 연세대행정대학원도 졸업하셨다면서요.

<>김회장=예순여덟살에 연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11세때까지
고향에서 한학공부를 하다가 목포로 이사와 미션스쿨인 영흥소학교를
4년만에 졸업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이던 미국인선교사가 "한시간 하루가
귀하다"며 2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시켜 준 덕입니다. 서울로 올라와
중앙고보 2학년을 중퇴하고 18세때 결혼했습니다. 뒤늦게 대학원을 다녔지만
대학원 다니기 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3시에 일어나 공부했습니다.
요즘은 4시에 일어나지만.

-그렇다면 취미생활은 별로 없는것 같은데요. 혹시 무취미 아니십니까.

<>김회장=음악을 좋아해 하루에 적어도 10곡이상 큰 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지금도 1군단 성가대장을 맡고있고요. (이렇게 대답하고난
김회장은 "메기의 추억"을 냅다 불러댔다)

<대담=유화선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