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도에 있어서 불교 승려가 소유할수 있었던 것은 "삼의일발"뿐
이었다. 대의.상의.하의등 3종류의 의복과 탁발할때 쓰일 발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승려에게 베풀수 있는것은 하루치의 양시과 옷을 지을수 있는
포밖에 없었다. 여기서 승려에게 베푸는 것을 포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 승려 또는 사원에 금전이나 물건을 베푸는 사람을 시주 또는 단나 (범어
로 dana)라고 한다. 조계종 종단내분에서 의혹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이 시주돈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이 거액의 시주돈이 "삼의일발"의 전신과
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보시는 반드시 재물이 아니라도 할수 있기
때문이다.

"무재의 7시"라는 것이 있다. 따뜻한 눈길로 보시하는 "안시", 부드러운
얼굴과 기쁜안색으로 보시하는 "화안열색시", 온화하고 브드럽게 말하는
"명언사시", 노동으로 봉사하는 "신시" 그리고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와
남을 즐겁게 숙박시키는 "방사시"등을 말한다. 이 "무재의 7시"야 말로
참다운 보시라고 할수 있다. 이때 시주가 상대방을 경멸하는 마음가짐으로
보시해서는 안된다. 시주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해야만이 보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단 불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나 모두 재물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부처나 예수, 마호메트는 모두 가난하게 살았고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예수)는
머리 둘곳이 없다며 한탄했다는 말이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딸라 청빈하게 산 제자들도 많았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종교는 생활의 부패를 막는 향료"라고
말한것도 종교의 이같은 열할을 지적한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느
종교든 종단는 세월이 흐르고 교세가 확장정비되면 본래의 교의에서는
멀어지고 세속에 휩쓸려 부패하고 타락하게 마련이다. 중세 가톨릭 일부
고위성직자의 부패타락상은 마침내 종교개혁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자극되어
가톨릭내부에서 반종교개혁이 일어나 오늘의 가톨릭교회가 된것은 역사적
교훈이 아닐수 없다.

종단이든 개인이든 항상 쇄신하지 않으면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인간의 운명인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조계종의
개혁은 조계종자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