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9월9일 대한항공사업본부 김해공장에서는 생중계로 텔레비전방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매우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바로 최초의 국산전투기
제공호 출고식이 거행된 것이다.

활주로 끝에 대기하고 있던 제공호는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힘차게 몸을
솟구쳤다가 다시 식장 상공에 나타나 한차례의 멋진 곡예비행을 실시하여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국산 전투기가 처음으로 출현한 역사적
인 순간이었다.

이 행사가 열린 곳은 여느 공장과 달리 항공우주사업이라는 원대한 계획
아래 세워진 공장이다. 수렁이나 다름없던 넓은 늪지대를 매립하여 단일
사업에 7백억원이 넘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건립했다. 최첨단 과학기술
이 집약돼 있는 한국 항공산업의 "메카"이다.

이날 출고된 제공호는 오래전부터 논의되던 자주국방 실현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중간 단계로까지 끌어 올린 청신호였다. 낙후되어 있던 우리 항공
산업도 이로써 단순히 정비만 하는 초기단계에서 완제기를 조립 생산하는
면허생산 단계로 뛰어 올랐다.

이미 77년 국내 최초의 500MD헬기 생산으로 우리 항공산업의 신기원을
이룩했지만 제공호생산은 방위산업의 한 분야로만 알려져온 항공산업을
독자적인 산업분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항공기 생산체계도 새롭게 정착시켜 부품 국산화율을 높였다.

국산부품의 수출과 주요부품의 국제공동개발사업참여를 통해서 수출전략
사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내가 항공운송사업에 그치지 않고 직접 항공기 제조와 방윙산업에까지
참여하려고 생각하게 된것은 월남이 공산화된 1975년부터였다.

그해 봄 남부지역의 방위산업공장들을 시찰하던 고박대통령은 수행했던
기자들에게 "우리나라도 80년대 중반쯤이면 신예 전투기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과연 우리나라의
방위산업이 그 정도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하고 반신반의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월남전에서 미국이 손을 떼버리자 하루 아침에 패망해
버리는 비극적 종말을 지켜보고 자주국방이야말로 우리 체제를 수호하는데
시급한 사안임을 새삼스럽게 각성하고 있던 터였다.

자주국방의 절실함과 정부의 항공기 생산에 대한 의지를 알았기에 나는
대한항공 정관의 일부를 개정해서 "항공기 제조 및 판매사업"을 추가하고
76년말 김해에 항공산업시설을 갖춘 공장을 준공시켰던 것이었다.

군수무기에 대한 일반 매출이나 해외수출이 전혀 허용될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당시 실정에서 항공기 제조사업은 한진그룹 전체의 사운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익을 얻기위해서 항공기생산사업에 참여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적 소명사업으로 알고 임했기 때문에 물질적인 손실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에는 미국 휴즈 헬리콥터사의 5백계열 헬기 국내 공동생산에 착수하여
77년 여름 국산 헬기 "솔개"를 군에 인도했다. 2년후에는 민수용 헬기도
시판하게 되었다.

박대통령은 78년초 기자회견석상에서 "헬기콥터는 이미 생산을 개시하여
양산체제를 갖추었다. 80년대 중반에는 항공기도 생산할 수 있도록 개발
능력을 키워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무렵 미군 당국은 태평양지역의 모든 미군기에 대한 창급정비를 수행할
수 있는 민간 정비기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79년 대한항공을 최적업체로
선정하고 정비계약을 체결토록 요청해왔다.

이 제의에 접한 나는 항공기의 분해결합 등 정비에 관한 노하우를 축적함
과 동시에 외화도 획득할 수 있음에 착안하여 상당금액의 시설투자를 감수
하여 계약을 체결하였다.

미군의 주력 기종인 F-4전투기의 정비업무를 시작으로 최신예 전폭기,
대형 수송기, 정찰기등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인 정비임무 수행으로 태평양
지역 미군용기의 정비 모기지역할을 해왔다.

이렇게 생산사업에 대한 노하우를 쌓아가는 동안에 당국으로부터 국산
전투기 생산지시를 받아 항공산업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