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응 백 <서울대 명예교수> **

"나비잠을 잔다"

어린아이가 팔을 마음껏 위로 뻗은채 잠자는 모습을 묘사한 순우리말
이다.

잊혀진채 생명을 다해가는 이처럼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내며 평생을
국어교육에 몸바쳐온 이응백 서울대 명예교수(71).

산골의 한문서당 훈장을 연상케하는 풍모지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제대로 된 우리말을 찾아내고 지켜야 한다는 강인함이 배어있다.

우리말쓰기를 강조해왔지만 한글만을 주장하는 한글전용론자는 아니다.
오히려 국민학교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는 한글.한자혼용론자이다. 30
여년을 지켜온 국어교육의 현장에서 은퇴해서도 고운 우리말쓰기 작업에
정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교수의 입장은 지금 당장 국민학교부터 한자를
교육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거듭된 한자교육 정책의 혼란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간다는
서울대학교 학생조차 한자를 제대로 못읽는 한심한 현상이 생겼다고 강조
하는 이교수는 더이상 한국의 젊은이들을 바보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단다.

88년 모교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교수직을 정년퇴직한 이 교수는
제자가 마련해준 국어연구소 사무실에서 아름다운 우리말 가다듬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한문을 모르면 바보가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교수=얼마전에 국민학교 학생을 대상으로한 퀴즈프로를 보니까 비가
내리면 이쪽 저쪽으로 빗물이 갈라져서 흘러내리는 고개를 무엇이라고
하느냐는 낱말알아맞히기 문제가 나오더군요. 퀴즈프로에 나올 정도의
학생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아이들일텐데 전혀 몰라요.

방청석에 있던 한 학생이 분계선이라고 답하던데 정답은 분수령입니다. 이
낱말은 지리책에 여러번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몰라요. 이유는 간단
합니다. 한글로만 가르쳐서 그래요. 가령 교사가 나눌분,물수,고개령이라고
뜻을 가르쳐줬으면 금방 알텐데 교사들이 이렇게 가르치지를 않아요. 그냥
분수령이 문장속에서 갖는 의미만 이야기합니다.

-국민학교에서 한글만 교육을 해도 10%의 미해득자가 생기는데 한자를
가르치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교수=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어독본에
한자를 국민학교 1학년부터 섞었습니다. 그 당시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일본의 유명한 암파문고본을 줄줄이 읽었습니다. 성인용책이지만 쉽게
읽을 수 있었지요. 당시에 비해 요즘 국민학교 학생들은 지능이 더 발달
돼있습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국민학교에서 3천1백89자를 가르치고 일본
에서는 1천6자를 가르칩니다.

-굳이 한자를 가르치지 않고 한글로 뜻만 가르친다고 해도 똑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교수=그렇지 않아요. 방금 말했지만 한자의 뜻을 모르면 한자로 된
단어를 모두 새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한자의 뜻을 한자 한자 배우면
여러한자로 이루어진 낱말을 스스로 알게됩니다. 어느 나라고 국민학교에
들어가기전에 아이들은 약 6천단어를 배웁니다.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이미 배운 일상적인 단어외에 각 과목마다 필요한 특수단어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학자들은 이런 단어를 교육어 또는 문화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어의 90%이상이 한자어로 돼있습니다.

지난 60년대에 교과서에 씌어진 한자를 조사해보니까 3천5백10자입디다.
그중에는 쉬울이 바꿀역처럼 같은 글자이면서 뜻이 다른 것도 포함돼
있으니까 절대 숫자는 이보다 적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단어 3천5백
자를 배우는 것보다는 그만큼의 한자를 외우는 것이 더 쉽다고 봅니다.
어떤 한글전용론자는 강희자전에 실린 한자가 무려 5만개라면서 어떻게
이를 다 배울 수 있겠느냐고 했는데 이말은 우리 국민을 완전히 우롱한
것입니다. 거기에 실린 축적된 한자수가 그렇다는 것이지 실린 한자를
모두 다 쓰는 것은 아닙니다. 1만자정도면 충분합니다.

한자를 깨우치면 모든 교과목에 실린 술어의 개념을 정확히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구름잡듯 유추만하지 한자의 뜻을 모릅니다.
모르니까 글이 재미가 없고 그러다보니 공부에 흥미를 잃게도 됩니다.

-공부에 흥미를 잃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한글전용론자들은 한글전용을
통해 일반 국민의 지식흡수능력이 빨라졌다고 합니다. 또 한글세대들은
책도 한글로 쓴것만 찾는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교수=요즘 출판업자들은 한글로 써야 책이 잘 팔린다고 한글로만
써달라고 하는데 말이 안됩니다. 타임이라는 잡지에 실린 영어단어가 아주
어렵다고해서 수준을 낮춘 적이 있습니까. 츨판업자들의 얘기는 모든 책을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배우는 6천단어 이내로 쓰라는 것인데 대단히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국민의 지식수준을 왜 6천단어에 묶어 놓으려고 합니까. 제작은 순간이고
활용은 영원한 것입니다. 적절히 한자를 섞어야 합니다. 국민들이 사전을
찾게해야 합니다. 한글로만 쓰면 시각효과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한자를
섞어쓰면 저절로 시각효과가 잘 나타나는데 한글로만 쓰다보니 고딕이다,
무슨체다 해서 이상하게 만듭니다. 장기적인 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한자를 섞어 써야 합니다.

-한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이교수=발전이 안되지요. 한자어로 쓰면 모르게되니까 글을 쉽게 바꿔
쓰게됩니다. 어떻게 모든 한자술어를 한글로 다 바꿔 쓸수가 있겠습니까.
설명하자면 긴 단어의 뜻을 단 두자나 석자로 만든 것이 한자술어입니다.
일종의 약속인데요. 이런 약속을 전제로한 술어의 사용을 피하고 해설만
한다면 당장은 괜찮겠지만 반복해서 나오면 어떻게 모두 다 씁니까. 책의
부피만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한글만 쓰자는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령 일반회사의 사보등은 한글만 쓰고 있는데요.

<>이교수=의식이 잘못돼있습니다. 많은 사보가 한글전용을 하고 대학신문
도 그렇더군요. 소위 의식화된 학생들이 신문제작도 맡다보니까 한글전용이
됐고 사보도 한글세대가 많으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한글만 쓸수 있겠습니까. 문화를 다루는 사람들은
국민의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해야지 자꾸 낮추기만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우선 괄호속에 한자를 써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한자만 보면 저항감을
느껴서 한자가 보이는 책은 사지 않는다고 합니다. 순한글로 돼있다고 해서
책을 사기만 하면 다 봅니까. 남들이 타임지를 끼고 다닌다고 덩달아
타임지를 사서 들고다니는 학생들도 있는데 그들이 읽습니까. 그렇지
않죠.

정말로 책을 읽는 학생들을 위해 한자를 괄호속에 넣어 저항감을 없애면
차츰 자기도 모르게 한자를 섞어 쓴다는 의식이 사라질 것입니다. 비유
하자면 음식이 담긴 병이 여러개있는데 이를 보자기로 덮어놓고 맛을
알라는 것이 한글전용입니다. 보자기를 벗겨버리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왜
덮어 놓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례를 들어보죠.

비원안에는 사허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한글로만 써놓으면 무슨뜻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넉사자와 빌허자 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사방이 확트여서
잘보인다는 뜻이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우리말을 쓰려고 하는 정신은 괜찮은 것 아닙니까.

<>이교수=물론 그 정신은 좋습니다. 나도 우리말의 어휘를 많이 발굴
했습니다. 쓸만한 우리말을 발굴해서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름에 더울때 바가지에 물을 떠서 뿌리면 수막이 하얗게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덤덤하게 수막이 하얗게 일어
난다고 하기보다는 나비물이라고 쓰면 얼마나 시적입니까. 나비물은 순
우리말로 나비의 나래와 같이 널리 퍼졌다는 뜻입니다.

또 옛날에 아주 작은 여자를 트랜지스터 걸이라고 불렀는데 이말도 데림추
라고 바꿔 쓸 수 있습니다. 데리고 다니는 추라는 뜻이지요.

-여성운동가들이 들으면 화낼만한 말인데요. 순우리말을 쓰되 한자어도
같이 배워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이교수=그렇게 바꿔 쓸수 있다는 말이지요. 글이란 자연스러워야합니다.

치료라는 말을 다스려나슨다라는 우리말로 바꿔야한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치료라는 술어가 정착이 돼있는 판에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 적이라는 한자를 모두 "스러운"으로 바꾸자는데 애국적이라는 말을 애국
스러운이라고 바꿔 쓸수가 있습니까.

-한자는 써야 한다면서 순 우리말의 발굴에도 노력을 많이 하신 흔치않은
분이신데 국어학을 전공하게된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이교수=특별한 동기는 없었고 경성사범 3학년 여름방학때 종로 야시장
에서 맹자를 사서 통독한 것이 계기라면 계기입니다. 대학진학할때 한문
소양도 있고해서 국어과를 택했지요.

-가족문집을 출판하셨다는데 앞으로 특별한 계획은 있으십니까.

<>이교수=결혼할때 집사람과 매년 내자고 했던 건데 결혼한 이듬해인
49년에 1집을 내고 쭉 못내다가 79년에 1집내용까지 포함해서 제비라는
이름의 문집을 냈지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집사람이 작년에 세상을 떴는데 1주기때 문집을 하나 낼 계획입니다. 지난
61년에 냈던 한글맞춤법사전의 개정판을 낼 계획도 있습니다.

대담=김형수 <국제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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