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컨테이너 위주의 선박회사를 구상하고 있던 당시 정부에서도 해운
조선 제1차 종합대책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수출물량은 급속히 증대되어
가고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화물이 외국선박에 의해 수송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써 벌어들인 외화로 외국 해운사 좋은 일만 시키고 있다고
정부는 판단했다.

그래서 정부는 3차 경제개발 계획 기간이 끝나는 81년까지 우리 수출
상품의 4할은 자국적 선박으로 수송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해운진흥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도 여러 선박회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한 두 회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세한 자본사정 때문에 큰 발전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같은 상황아래 77년초 청와대로부터 전갈이 왔다. 고 박대통령은 대한
항공이 한국의 국력보다 앞서 나가며 나라 체면을 세워주고 있다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극구 칭찬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살려 해운에도 힘을
써달라고 격려와 함께 부탁을 해왔다.

어차피 나의 구상도 있었던터에 박대통령의 간곡한 권유까지 있다보니
한진해운 설립을 서두르게 되었다. 설립후 한달이 채 안돼 1만8천t급
컨테이너 전용선 4척을 울산의 국내 조선업체에 발주하는등 바다로의 꿈을
다시 실현해갔다.

그후 10년뒤 나는 뜻하지 않게 부실 해운회사 하나를 인수하여 한진해운과
합병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인수한 대한선주는 국영기업체인 대한해운공사로
출발한 회사였다. 그러나 79년 2차오일쇼크 이후 해운경기의 구조적 불황과
선사들간의 과당경쟁,적취율 저하,운밍하락등으로 83년이후 경영수지가
악화돼 누적 결손이 7천4백85억원에 이르는등 파산의 벼랑에 서게 됐다.

결국 86년8월부터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의 자금관리를 받기 시작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정부는 이 회사가 도산할 경우 국내해운업계
가 받는 타격을 우려했다. 우리 경제의 대외신용도 실추와 대량 실업,하청
업체의 연쇄 도산으로 인한 물의,은행의 연쇄 부실화등 경제 파급 위험이
예상되자 제3자에게 인수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해운사들이 대부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어 누구도 부실기업
인수를 달가워할리 없었다. 한진해운도 마찬가지였다.

한진해운의 고전의 북미서안 정기항로만 컨테이너선을 취항하다가 86년2월
부터 북미동안 정기항로에도 풀 컨테이너선 6척을 새로 만들어 취항시켰기
때문이었다. 이 항로엔 원래 대한선주가 배선하고 있었으나 채산성 악화로
선대를 철수해 국적선 공백 상태였다. 이 공백을 정부의 풀 컨테이너선
확대 시책에 부응하여 한진해운이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인 86년10월,대한선주의 인수를 권유받았으니 불황타개를 위해
감량경영체제에 돌입해 있는 상태에서 또다른 해운업에 손댄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완곡히 거절했다.

두번의 거절에도 불구,세번째의 인수 요청이 들어왔을 때는 어떤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의 육해공 종합 수송업체로써
한국의 수송업계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면서 타산적인 차원으로 관계자들의
고뇌와 업계 현실을 외면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금융부채
3천8백54억원을 부담하며 인수,회생시키는 노력에 들어갔다.

4천억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고 처음으로 손댄 것은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된 비경제 노후 선박들의 처분이었다. 인수 당시 산정한 가격의
반값 밖에 안되었지만 미래를 보고 과감히 처분,신형경제선들을 도입한
것이다. 이와 함께 취항로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비용을 줄이면서 하주
에게는 신속,안전한 서비스를 제공토록 조치했다.

또한 신조선을 건조하면서 당시 세계에서도 드문 고장력강에 대한 최신
기술이 있음을 알아내 사양을 지정하여 발주하였다. 안전성에는 전혀 문제
가 없이 강판의 두께를 5미리 정도 조절하여 선박의 중량은 13%나 줄여
화물을 더많이 탑재할 수 있게 했다. 속도가 빨라지고 연료절감까지도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진해운은 93년 매출액 1조2천억원을 넘는등 2년 연속
국내선사중 1위를 기록하며,21세기를 지향하는 그룹의 경영목표에 발맞추어
세계적 종합물류시스템의 중요한 축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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