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석유파동 뒤인 74년 불가피한 적자에도 불구하고 이 한햇동안의 매출
성장은 13%나 되었다. 우리 경제가 침체에 빠져들지 않는한 대한항공을 2~3
년내에 다시 흑자로 끌어 올릴 자신이 생겼다.

이무렵 매일 밤낮으로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온통 기름과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1개월 이내에 대금 결제를 해주지 않으면 항공기에 연료공급
이 중단될 정도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73년에 새로 들여온 점보기를
담보로 내놔야 할만큼 다급한 상황에까지 몰렸다.

5천만달러가 필요했다.

5천만달러란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금액이었다. 그때 도움을 청한 곳이
프랑스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

업무상 인연을 맺었던 이 은행 로레 총재에게 지불보증을 부탁했다.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로레 총재는 뜻밖에도 두말없이 승낙을 했다.
그는 드골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역임한 유능한 금융가로 당시의 위기를
넘기게 해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인연이되어 뒷날 나는 이
은행과 합작으로 "한불종합금융"을 설립하기도 했다.

회사 내부적으로는 임직원들의 애사심에 호소를 하면서 원가절감캠페인을
벌였다.또 시설과 항공기재,장비가동률을 높여나가기위해 온힘을 기울였다.

이럭 저럭 어느정도 고비를 넘기게 되자 장기적인 안목으로 앞날을 전망해
봤다. 이때 문득 "현재가 어렵다고 마냥 위축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순간의 소나기끝에는 맑은 햇살이 있고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는법이다. 미래를 겨냥하여 투자를 멈추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했다.
바로 "불황기에 앞으로 다가올 호황을 대비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
이었다.

일본에다 사원아파트를 지어 해외근무 직원들의 사기진작에 신경을 쓰는
한편 항공기 구매계획을 추진해나갔다. 대형 IBM컴퓨터를 도입하여 국제선
여객예약 전산시스템을 갖추는등 서비스개선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포공항 한쪽에다 대한항공은 물론 계약을 맺은 외국 항공사들의 기내용
식음료를 조달하는 캐터링 서비스빌딩도 세웠다.

DC10기 3대의 구매 계약을 체결해 신기재의 확보와 노선 확장에도 힘을
쏟았다. 일본항공에 앞서서 태평양상 최초의 점보화물기를 투입하여 서울~
LA노선에 취항시킨 것도 한창 어려움을 겪을때였던 74년9월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석유 파동여파로 인한 원가상승과 급격한 수요감소등 기업환경의
악화로 공급력이 B707기의 2.5배나 되는 B747화물기의 운용을 꺼리는 항
공사가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이 없이는 발전도 없다는 민영화 초기부터의 일관된
경영 전략과 화물 수송분야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판단아래
B747화물기투입을 결정했다.

불경기때 투자하라는 말은 쉽지만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사업하는 사람,그
최고책임자의 의사결정은 참으로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

판단의 결과에 따라 회사는 물론 임직원의 "행과 불행"까지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대통령께서는 "참으로 외로운 결단
을 내려야 할 때가 많다"는 표현을 종종 하시는데 그러한 말속의 의미가
불경기때 투자를 결정해야하는 기업가의 심정과 같이 않을까.

장남 량호를 대한항공에 입사시켜 현장에서 경영수업을 받도록 한것도 이
무렵인 74년말이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도중에 병역을 마치기 위해
귀국해 전방과 월남에서 군대생활을 하다가 만기 제대한 뒤였다. 20년이
지난 현재는 사장을 맡고 있지만 입사초기에는 정비부문을 비롯 밑에서부터
철저한 현장수업을 받도록 했다.

오일 쇼크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긴 대한항공은 이듬해 75년 매출액 1천억
원을 돌파했다. 원가 상승분을 생산성 향상으로 흡수하여 약간의 흑자도
기록했다.

세계 대부분의 기업들이 석유파동으로 인해 곤경에 처해 있을때 오히려
적극적인 해외 판매망 확장과 대형기에 의한 장거리노선 개발에 전력을
다한 결과로 생각되었다. 또한 뒤에 언급하겠지만 타이밍 맞게 중동에
진출한 것과 정부의 지속적인 성장 정책및 수출 확장 정책으로 화물수요가
증가한 것에도 힘입은 바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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