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원 철 기아경제연구소 고문

이무렵 정주영회장은 데이비스라는 미국인을 만났다. 그는 한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해주었다. 먼저 조선소건설에 필요한 기자재를 어디서
갖다 쓸것인지를 결정하고 이를 공급하는 회사를 통해 은행들을 움직여
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샐러스 크레딧(Seller"s Credit)기법이었다.
영국 애플도어사(A&P Appledore)와 스코트리스고사(Scott Lithgow)도
소개시켜 주었다. 애플도어사는 하원의원을 역임한 롱바톰씨(Longbattom)
와 사업자였던 내쉬씨(P Nash)가 합작으로 설립한 선박컨설턴트회사로서
두사람이 각각 회장과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롱바톰회장은 버클레이
은행을 움직일수 있을만큼 영향력이 컸다.

정회장일행은 다시 런던으로가 롱바톰회장에게 현대의 해외건설실적과
방계기업의 발전가능성,조선소 입지조건및 장비,특히 한국의 풍부하고
질좋은 노동력을 들면서 조선사업이 성공할수 있음을 역설했다. 또
버클레이은행을 설득해 달라고도 부탁했다. 롱바톰 회장은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선박을 사줄 사람이 없는데다 한국의 차관상환능력이나
성장잠재력등에 의문이 많아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 한국과
현대의 조선실적과 능력으로서는 사업계획서에 나타난 바와 같은 대규모
조선사업은 환상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정회장의 끈질긴 설득끝에 롱바톰회장도 차츰 생각을 바꿨다.
애플도어사와 기술및 선박판매협조 계약을 맺는 대가로 60만달러의
용역비를 지불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이회사의 내쉬 사장은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이후 롱바톰회장은 한국에 직접 와서 현대건설의 발전소
시공능력과 정유공장 건설등 기계.토목공사 경험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선공사의 걸프와 유조선 계약에 대해서도 알고갔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현대가 대형 조선소를 지어 독자적으로 경쟁력 있는 큰
배를 건조할수 있다"는 추천서를 써 버클레이 은행에 건네 주었다. 현대는
곧 애플도어사및 스코트리스고사와 기술제휴계약등을 체결했다. 71년9월의
일이다.

정주영회장등은 버클레이은행과 다시 접촉을 시도했다. 강한 보수성과
원칙주의를 철저히 고수하며 현대의 조선사업계획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버클레이은행도 점차 움직여갔다. 애플도어사의 보증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차관문인 버클레이 은행을 통과했다. 차관제공결정이
난것이다. 그러나 더 어려운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수출신용보증국
(ECGD:Export Credit Guarantee Department)의 승인이 그것이었다. 영국에서
은행이 차관제공을 결정해도 ECGD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차관을 가져간
나라가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게 되면 영국 정부가 책임지고 보상해주는
제도때문이다. ECGD의 기준은 까다롭기 이를데 없었다. 은행의 사업타당성
조사결과를 비롯해서 차관도입국의 경제적 장래성까지를 종합해서 신용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결정하게 된다. 차관도입국의 컨트리 리스크
(Country Risk)까지도 감안한다.

ECGD의 승인은 낙관할수 없었다. 우려속에 며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마침내 정회장은 ECGD측과의 면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정회장이 ECGD를
찾아갔을 때 담당국장은 버클레이 은행에서 넘어온 관계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현대의 조선사업계획에 이의가 없으며 애플도어사까지
인정한 현대의 능력을 신뢰한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영국 제일의
버클레이은행이 현대가 배를 만들어 원리금을 갚을 능력이 있다고 평가
했으므로 그 면에서도 이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과 같은 후진국에서 그것도 처음
만드는 거대한 배를 과연 누가 사줄 것인가. 선주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세계 각국의 유수 기존조선소에 주문하지 무엇
때문에 배를 만들어 본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외상으로 살수도 없는 현대에
주문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어 "현대에서 만드는 배를 살 사람이 없다면,영국은행에서 빌려간 돈은
갚을수 없을 것이므로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갖고와야
승인해주겠다"고 덧붙였다. 이치적으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천만달러나 되는 배를,그것도 조선소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조선소 부지로 예정된 울산의 백사장 사진 한장과 선박설게도면만 가지고
있는 처지의 현대가 어디 가서 배를 살사람을 구한다는 말인가. 배를 사는
사람이 있으면 지원해 주겠다는 ECGD의 조건부 결론은 승인거부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현대로서는 조선사업 계획을 포기하든가,아니면 만들지도
않은 배를 팔러 나서야 했다.

정회장은 런던지점으로 돌아왔다. 직원들과 의논끝에 좌절해서는
안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선주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준비된 것이라고는
울산시 미포만의 잡초 우거진 백사장 사진 한장과 5만분의 1지도
한장,그리고 스코트리스고사에서 만든 26만t짜리 유조선 도면 한장이
전부였다. 국내에는 있지도 않은 조선소에서,만들지도 않은 배를 팔러
다닌다며 "봉이 정선달"이라고 스스로를 풍자했다.

그러던 어느날 정회장에게 애플도어사의 롱바톰 회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롱바톰 회장은 친구인 선박브로커 사익스씨(Sykes)를
소개시켜 주었다. 사익스씨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국제
해운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그리스 선단의 사주 요르거스 리바노스씨가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롱바톰 회장과 사익스씨는 "현대의
사정이 어려우니 처음에는 밑질각오를 하고 싼값을 제시하라"고 귀띔
하면서 리바노스씨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리바노스가는 1세기 이상 해운업을 영위해왔다. 한때는 선박왕 오나시스를
능가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요르거스 리바노스씨는 선단을 확장하고
있던 차에,일본에서 몇차례 싼값으로 배를 구입해서 재미를 본 뒤부터는
신생조선국으로부터 싼값으로 배를 구입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정회장은 71년 10월중순 리바노스씨를 만나기 위해 스위스로 갔다. 그를
만나서는 척당 3천6백만달러인 유조선 2척,모두 7천2백만달러 규모의
상담을 진행시켰다. 리바노스씨는 일방적으로 조건을 제시했다. 가격은
척당 3천95만달러,2년6개월후 인도,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원리금을
전액 변상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국제선가와 비교할때 16%나 싼 가격
이었다. 현대로서는 수주여부가 절박한 상황이었으므로 계약내용을
따지고만 있을수 없었다. 더구나 이제 막 조선소를 만들려는 입장에서
최초의 상담 성공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누구로부터 몇 급의 선박을
발주받았느냐에 따라 국제금융의 여신과 지급보증은 물론 다음번의
수주상담,나아가 조선소의 장래까지도 결정되는 것이다. 리바노스씨와의
상담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했다. 계약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리바노스씨는
10%의 선수금을 송금해 주기로 했다. 서둘러 계약서사본등 관련서류를 ECGD
에 제출했다. 이로써 제2의 관문도 통과했다.

곧 버클레이은행을 중심으로 공동차관단이 구성됐고 현대는 당초 계획보다
많은 5천75만달러에 이르는 차관계약을 체결했다. 71년 12월 정부로부터
도입인가를 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발효되었다.

여기서 김훈철박사의 회고 한가지를 곁들인다. "사업계획서에 대한
기술검토 의뢰서가 KIST로 왔습니다. 내용을 보니 현대조선소에 설계실
설치계획이 전연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현대에 알아보니 설계는
영국에서 작성해서 비행기로 수송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조선소에
설계실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최소한 5백명은 있어야 한다라고
강력하게 의견을 제시한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현대는 설계실을 만들었으며 1년후엔 2백명으로 증원했고 한때는
1천2백명으로 확충됐다. 김박사 회고로는 "당시 정회장은 설계도란
외국에서 사오기만 하면 끝나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설계도란
배를 만들어 나갈때 계속 수정하고 새로 그려야 하는 작업입니다"라고
덧붙였다. 현재는 컴퓨터가 설계를 해주는 시대가 되었다.

정회장은 영국으로 떠나기전 까지만 해도 25만t급의 조선소를 건설한다고
했다. 그런데 영국에서 계약을 마치고 정회장은 "50만t급 조선소 건설계약
을 체결했다"고 영국현지에서 발표했다.

도크만 크면 50만t급 유조선을 만드는 것이나 25만t 급이나 별 차이가
없다. 도크 크기도 25만t 도크나 50만t 도크나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정회장은 뱃심대로 50만t 이라고 발표했을 것이다. 이
발표를 보고 필자는 심히 기뻤다. 우선 차관교섭에 성공한 정회장에게
축하했다. 우리나라는 조선공업을 무에서 시작해서 세계 최대급
최신조선소를 건설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때가 우리 조선공업이 세계적
조선강국으로 약진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여기서 초대형 유조선 VLCC(Very Large Crude Carrier)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 소개하려고 한다. 최근 건조한 28만DWt 의 VLCC의 명세가 있다.
(주:94년부터는 국제해사기구 결정에 의하여 선체가 2중구조를 갖도록
법제화 되었으므로 다음 수치는 조금씩 더 커지게 된다)

1 길이가 3백15m다. 이 길이는 아파트 몇동의 길이가 된다.
2 폭이 57m 다. 배주위를 한바퀴 돈다면 7백m 가 넘는다는 계산이다.
3 높이가 30m 다. 아파트 10층높이다.
4 갑판의 넓이가 1만7천평방미터 (5천2백47평)이다.
5 이 배 한척을 만드는데 3만t 의 각종 철재가 소요된다.
6 이 배는 2백만배럴의 원유를 수송할수 있다.
7 이 배는 3만4천6백50마력의 엔진에 의해서 움직인다. 엔진의 중량은
9백70t이고 엔진크기는 길이 13.5m폭 4.8m 높이가 14.8m나 된다. 5층집
높이다.
8 이 엔진에서 나오는 힘은 직경 90cm 길이 13m 의 스크루샤프트에 의해서
전달된다. 스크루(프로펠라)는 직경 10m에 무게가 67t 이나 된다.
9 배의 가격은 세계해운시장의 변동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75년에
3천8백만달러 하던것이 80년에는 6천3백만달러로 올라가더니 85년에는
3천7백만달러로 떨어졌다. 92년에는 8천5백만달러,93년에는 대우조선소
에서 배 한척에 1억달러씩으로 6척을 수주했다.
10 국산화율은 75년 15%정도에서 93년 현재는 90%이상된다.

72년3월25일 현대조선의 기공식이 거행됐다. 세계 일류조선국을 향한
웅대하고 장엄한 거보를 내디디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박대통령은 이날 기공식에서 감격적인 축사를 했다. 세계에서 7개국밖에
없는 50만t급 대형조선소를 우리나라도 갖게된데 대한 감회를 밝히고 수출의
획기적 증대를 주도하는 전략산업으로 발전하기를 축원했다. 정부에서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소건설이 본격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