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미래를 내다보면서 생활한다. 때로는 앞날에 대한 준비
이기도 하고 희망이나 기대일수도 있으며, 미래에 대한 예견일수도 있다.
이러한 비전이 없는 인생은 초라해질수 밖에 없다. 예전 우리네 조상들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 그 아이가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되면 그때
가서 다 자란 오동나무로 장롱을 만들어 보내고자 하는 생각에서 였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필리핀에서도 있다. 거기서는 야자수 두그루를 심어
살림의 밑천으로 삼는다고 한다.

개인이나 집안의 일도 그러할진대,국익과 직결된 국가적 사안이 장기적인
안목없이 처리될 경우에는 그 폐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미간에 체결된 항공운수협정이라 하겠다. 물론 어려운
시절에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심정에서 불공정한 협정이라도 체결
하고 미국기의 취항을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늘날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일방적인 불평등조약으로 우리나라 민간항공발전에 하나의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한항공이 70년대초 미주노선을 개설하는데는 두가지 커다란 난관이
있었다. 그 하나는 기존 한미항공협정을 개정하여 협정내용의 불균형과
노선 구조상의 불리함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었다. 또다른 과제로는 전혀
생소한 미주지역에 영업기반을 다지고 판로를 개척해야 하는 일이었다.

정부수립직후의 잠정협정에 이어 57년4월 정식으로 체결된 한미항공협정에
의해 우리나라 항공사에 허용된 노선은 알래스카 경유 시애틀까지의 북
태평양노선에 한정되어 있었다. 비교적 영업가능성이 있는 호놀룰루나
로스앤젤레스등의 노선에는 운항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 어느 도시에서나 출발하여 한국에 들어와 제3국으로의 이원권까지
확보하고 있는 미국측에 비해, 호혜평등의 원칙이 전혀 무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국가간에 맺어져 있는 한미항공협정개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미국측은 한국에서 더 받을것이 없는데 무엇을
주느냐는 식이었다. 아예 협상 테이블에 나오려 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우정은 우정, 장사는 장사"라는 식의 냉담함이었다.

그래도 나는 취항 이후에 대비하여 70년11월 우선 로스앤젤레스지점을
설치하고 뉴욕 시카고 휴스턴에 각각 영업소를 내는등 배수진을 쳐놓았다.
미당국도 우리측이 끈질긴 설득과 성의를 보이자 조금씩 양보 의사를
보이더니, 71년1월 마침내 항공협정의 개정에 동의했다. 현실적으로 취항이
가능한 미주노선 운항권을 얻을수 있게 되었다.

대한항공이 민영화된지 2년만인 71년4월 서울~도쿄~로스앤젤레스를 잇는
태평양 횡단노선에 우선 정기적으로 화물기를 취항하게 된 것이다.

어렵사리 취항이 결정되었지만 정작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었다.

부랴부랴 서둘러 전담조직을 신설하는등 준비에 나섰지만 항공화물 운송
사업에 종사해본 전문가가 없었다. 게다가 취항일정이 정해지고 나서도
막상 실어나를 화물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취항을 연기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민항의 숙원사업이던 미주노선 개설 첫걸음부터 주저앉을수는
없었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당시 대미 수출품의 대부분이 가발류임에 착안하여
가발수출업체를 찾아 나서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하였다. 느닷없이 가발
비상이 걸린 실무자들은 오직 사명감 하나로 외국인 바이어들을 찾아 나서고
일부는 가발업체를 찾아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 다녔다.

가발업체 대부분이 중소규모로 도처에 산재해 있어서 그 소재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여간 어려운것이 아니었다. 영업담당 직원들이 수출조합에 찾아가
파악한 주소록을 들고 복덕방에 가서 위치를 알아내 겨우 찾을수 있었다.

같은 값이면 우리나라 비행기로 수출해 달라는 설득에 선선히 응해주는
일부 업자들이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었다. 이렇게 확보된 물량을 싣고
국적기 대한항공이 71년4월26일 드디어 태평양을 나는 감격의 순간을 맞이
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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