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당국자들이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할 적격자로 굳이 나를 지목
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던것 같다.

첫째는 내가 이미 60년 한국항공을 설립해 항공사 경영에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5.16혁명을 고비로 중도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한진상사 초창기부터 육해공 종합수송사업에
열의와 집념을 갖고있다는 것이 한국항공의 짧은 발자취를 통해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그동안의 사업과정,특히 수송산업의 월남진출을 통해 추진력과
애국적인 열정같은 것이 감안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든다.

정부가 수립된 직후 미국이 겨우 3천만달러 규모의 원조자금문제로 곤혹
스럽게 했던 일이라든가,60년대말 우리의 빈약한 외환사정 등을 감안하면
한진상사가 66년이후 월남용역사업을 개척해 매년 3천만달러정도의 외화를
벌어들인 것은 역사적인 기록이라는 얘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 역시 빚더미에 올라 앉은 항공공사를 인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동남아 11개국 항공사 가운데서 11번째 가는 항공사
였다. 보유하고 있는 비행기가 8대라고는 하지만 전체 좌석수를 합해도
오늘날 점보기 한대에 해당하는 4백석도 채 되지 않는 보잘 것없는 것
이었다. 그나마 DC-9 제트기 한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수명이 다하거나
임차한 프로펠러기였다.

게다가 항공공사의 누적적자는 차치하고라도 짊어지고 있는 국내외 장단기
금융채무만 해도 자그마치 27억여원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니 사업을
한다는 사람치고 바보가 아닌이상 항공공사를 맡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는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여권의 재정통이었던 김성곤씨와 김형욱중앙정보부장,이후락청와대
비서실장등으로부터 세차례에 걸쳐 항공공사 인수압력을 받았지만 정중하게
사절할수 밖에 없었다.

이러던 차에 68년 여름무렵 청와대로부터 느닷없이 부름을 받게되었다.
68년 박정희대통령은 그 전해 6월 실시된 선거에서 당선돼 집권 2기째를
맞고있어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다. 외교에도 큰 비중을 둬
65년 한일협정조인이후 매년 두차례 정도는 해외순방을 하는 편이었다.
68년봄에도 존슨 미국대통령과 호놀룰루에서 회담을 가졌었고 9월에는
호주방문이 계획돼 있었다.

이무렵 나는 세차례에 걸쳐 정부 당국자의 항공공사 인수요청을 사절한
후였던지라 느닷없는 청와대의 부름이었지만 그 의미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사전에 회사의 주요 간부진들과 협의를 통하여 거듭 거부
의사를 굳히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박대통령은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고 단둘이 남아 독대하게 되자 어려운
부탁이 있다고 하며 꼭 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대통령 재임기간중에 별도의 전용기는 그만 두고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나들이를 한번 하고 싶은게 소망"이라고 얘기했다.

또한 "월남에서 휴가를 나오는 우리 장병들이 외국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장병들의 사기도 문제려니와 귀중한 외화가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끝에 마침내 본론에 들어가 항공공사를 맡아 운영해
달라고 하였다.

내가 묵묵부답으로 있자 박대통령은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1번지
이며,국적기가 날고있는 곳에는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이 아니냐"며
항공공사를 맡아줄 것을 재삼 요청하였다.

한나라의 원수인 대통령께서 국가체면까지 거론하며 그렇게까지 요청
하는데는 사업가로서 더이상 거절할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항공공사 인수를 회사 간부들과 의논해서 수임
사항으로 알고 맡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다. 다만 "힘이 미치는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 어려운 사정이 생기면 꼭 세번만 대통령을 찾아뵙고
의논을 드리겠다"고 했다.

그러한 나의 의견도 받아들여졌지만, 후일에 대통령께 어려움을 호소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