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현 <본사회장.고려대 초빙교수>

21세기의 선택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 1세기여동안 한국의 근대.현대
변화의 일반유형을 검토해 보자.

첫째는 변화의 비균질성이다. 한국의 근대이후 변화는 균형.균질성이
없이 진행되어 왔지만 앞으로 21세기초반까지도 이런 불균형 비균질성이
계속될 것이다.

그동안 밖의 변화는 너무 빠르거나 단절적이었다. 이는 늘 점진적 자발적
의식적인 안의 준비를 허용하지 않았고 우리도 또한 밖에 대해 너무 무지
했다. 게다가 우리 규모가 밖의 상대자 투입자 경쟁자의 규모와 과도하게
차이가 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명분과 논리의 균형 균질 평등 조화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현장과 실천적 전개는 늘 불균형 비균질 비평화적이었다.

두번째 변화의 유형은 시간의 급진성이다. 안과 밖의 시간 속도차이와
규모의 과도한 차이는 항상 시간을 관리하고 미래를 준비하여 맞이하기
보다 대사는 늘 시간에 쫓기고 미래로 부터 엄습당하여 왔다.

시간의 급진성은 관심부문과 비관심부문,성장부문과 정체부문,체제부문과
비체제부문간의 대극성 양극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관심부문에서의 역사의
조숙과 비관심부문의 지체가 그것이다. 기독교 스포츠 예술의전당 반도체
기억소자 재벌 외교공관은 조숙이요,국어 역사정리 관리 정치 비판 질서
창의는 지체이다.

변화시간의 급진성은 또한 한 주도변화의 보편화의 성숙 난숙을 거친
자연스러운 다음단계 변화로의 발전 상승율 진행시키지 못했다. 현재의
주도변화와 그 앞과 뒤의 주도변화간의 단절로 인하여 우리 사회공동체
안에는 성숙과 소화가 덜된 중층적 잔영들이 덕지덕지 산일되어 있다.
과거와 근대와 현대와 미래가 중측적으로 쌓여 있고 전전과 전중과 전후와
미래가 중층적으로 널려있고 독재와 교과서민주주의와 가부장 정치문화와
발가벗은 사리가 숨어있다.

현대.근대 한국변화의 비균질성과 시간의 급진성은 결국 한국에서 변화의
관리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밖이며 우리는 변화의 객체이거나 대리자이며
이땅은 전장의 대토이거나 실험장이었다는데 원인이 있다.

이제 21세기의 선택을 고찰함에 그 지향이 어떤쪽이든간에 가장 중요한
대목은 그것이 우리에게 변화의 비균질성과 시간의 급진성을 극복할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변화의 주체와 주연,주무대,중심의 장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철학과 정책에서 "국유"에의 지향을 볼수있다. 이것은 공산당이나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만든 강령이 아니다. 바로 이들과 이념투쟁을 벌렸던
우파 민족주의를 대변하던 임시정부의 52년전 강령이라는데서 우리는 더욱
우리의 주체적 선택의 어려움과 혁명성을 상감하게 한다. 우리가 정통이라
믿는 우리 선열들의 정책을 따랐다면 우리는 지금 미안하나 몽고의 꼴이었을
것이며 오늘 이 토론을 개최하는 주최도 장소도 없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지금 세계적 보편원리로 믿고 우리가 이를 채택 유지발전
시켰기 때문에 우리가 성공했다고 믿는 시장경제원리와는 정반대의 원리
비전정책을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근거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채택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시장경제 민간기업주의 원리와 정책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었고 시대의 파도를 탄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정치와
다원가치의 문화를 꽃피울수 있게 되었고 선진국으로의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한말의 개화나 해방이후 남쪽의 시장경제체제는
안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선택당하고
타율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결과가 좋았다고해서 선택당함의 피동과 타율과 무책이 정당화될수 없다.
또 이런 피동과 타율은 창조의 힘이나 미래개척의 동력을 제공할수 없다.
"현재의 연장"이 계속되면 발전을 지속하고 선진국이 될수 있다거나 국운이
좋으니 평화가 올수 있을 것이라는 피동과 반주체와 타율이나 1등하는 자의
뒤를 따른다는 2등주의로서는 21세기의 준비와 선택을 관리할수 없다.

어쩌면 21세기 선택은 한국으로서는 근대이후 최초의 주체적 선택일
것이다. 주체적 자율적 선택이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선진국이 돼야한다. 한국이 선진국이 돼야하는 이유는
오늘의 선진국이 선진국이고자했던 이유,즉 소비주의적 향락적 편리의
추구나 식민지확보,군사적 팽창때문이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선진국이 돼야하는것은 우리국민 모두가 별장갖고 요트갖고
해외관광으로 향락하고 필리핀식모 부리고자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한민족공동체의 생존과 복지와 평화의 최소조건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에게만은 중진국 후진국으로서도 공동체로서의 생존과 시민의 복지와
국가의 평화가 유지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의 특수하고도 예외적인 지정학적 지경학적 위치때문이다. 이
지구상 어느나라도 세계에서 실력(군사력 기술력 산업력 자본력 자원 인구
공간 문화등)으로 1등 2등 3등 4등하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4대강국과
국경을 나누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외에는 없다.

하나의 강대국옆에 살아도 작은 나라는 끊임없이 비극을 겪는다. 하물며
세계최대의 4강국과 접해있는 한국의 지정학은 우리가 최강국과도 "결정적
협상력"을 갖는 선진국이 되지 않으면 결정적 비극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양으로서 이들과 대결하려해선 안된다.
질의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기술의 질,정보의 질,산업의 질,문화의 질을 높여 선진화를 이루고 기술
정보산업 문화의 몇가지 전략적 선택부문은 4대강국도 우리에게 무릎을
꿇릴수 있도록 결정적 첨단과 우위를 발명 창조 유지해야 한다. 모스트
파워가 아니라 베스트파워의 나라라야 한다.

양적 팽창주의적 제국주의적 선진국화가 아니라 질과 핵심과 원천으로서
양을 꺾을수 있는 전략적 선택과 집중의 길이어야 한다.

모든 부문은 모두 일류화 일등화하기에는 우리의 규모가 모자란다. 남북
통일이 되어도 이 조건은 변동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지정학적
조건은 100가지의 2등품보다 5가지의 1등품이라야만 4대강국에 협상력이
생긴다. 따라서 어느 부문을 전략적부문으로 선택하고 그 전략적 부문
에서도 어느 요소,어떤 과정,어느 부위를 전략적으로 집중육성하여 선도
대상으로 할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선택과 사상,그리고 선택부문의 세계
전략화 일등화 이것만이 질의 선진국화를 가능케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기술 산업 정보 문화부문을 전략적 분야로 선택코자 한다.

후발자가 선발자를 쫓아가고 이기는 원리법칙이 있다.

첫째는 철저한 모방이다. 철저한 모방만이 앞서간자의 앞선 실체를
파악할수 있게 한다. 모방을 해도 일등 모방해야 한다.

둘째는 스승을 이기겠다는 경쟁정신과 창조의 자세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모방해도 모방만으로는 부가가치와 창조가 나오지 않는다. 지금 비록
모자라서 배우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배움에 그치지 않고 새것 새혁신을
더해 그 스승을 물리치겠다는 경쟁의 정신이 불타야만 창조가 결실된다.

셋째는 국제화이다. 새창조와 일등 일류화를 위해서는 전세계에 정보의
안테나를 열고 비교의 준거를 전 세계로 펼쳐야만 새로운 혁신 창조의
계기를 마련하고 발전의 자극과 동기를 얻게 된다.

넷째 자국의 전통과 문화 특유성을 유지하여 이를 새 환경에서도 지키려
노력하는데서 새 혁신이 나온다. 또 특유한 자기 사회.문화.경제.환경조건
에 충실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그 과정에서 자기의 특수조건이
세계의 보편적 조건으로 전환될수 있다.

인류는 이제 40억년의 지구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사회"를 이루려한다.
이제 지구라는 행성의 물과 땅과 공기와 태양의 빛을 받고 사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들은 처음으로 지구가족,지구사회,지구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들의 생명의 안전과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지킬수 없다는 인식의 공유
가 전개되고 있다.

이제 국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계인류의 공통된 문제군(Global
Problematique)으로서 인구 자원 에너지 환경 도시과밀화 교통 노령화
가족파괴 마약 핵 생물화학무기 테러 빈곤과 난민. 문제들에 대하여
(국제적 관점이 아니라)인류적 지구적 세계적 관점에서 여러결정과
정책들을 조직화해야 되는 단계에 있다.

"A Strategy for the Future(1974)"이 저자이자 피아니스트이며 교수인
어빈 라즐로가 말하는 세계시스템 구축의 제2국면에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면 "세계황상시스템"이나 임마누엘 칸트가 1795년 그의 "영원한
평화"(Perpetual Peace)에서 그린 "세계공화국"이 한시대안에 성취되리라고
성급히 단정하는 과리상주의자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역사와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세계적,지구적단위의 통합화라는 큰
공전의 궤도를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런 인류로서의 공동체
형성에 대한 진보적 자유주의적이상을 버려서는 안되고 신념과 대책을
키워야 한다.

그것도 선도적으로 키우고 비전과 원리와 정책을 정밀하게 연구해 나가야
한다. 연구에 끌리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거래하는 4대강국중 일본을 제외하고 미국 러시아 중국은 사실
잠재력만으로 보면 식량 자원 에너지 기술 공간의 측면에서 세계에서도
가장 자급자족적 구조를 가질수 있는 나라들이다.

오히려 한국 스위스 벨기에 스웨덴 네덜란드 이스라엘등이야말로 식량
자원 에너지의 절대적 수입국(대외의존형소국)으로 그들의 생명의 안전과
복지를 지구사회에 더 의존하고 있다.

한국은 더구나 핵의 문제,남북빈곤의 문제,난민(보트피플)의 문제에다
심각한 환경의 위협아래 있다. 하나는 우리자신의 세계에 유례없는 과도한
수도권 집중과 도시과밀화로 인한 환경의 문제이며 또 하나는 중국의
공업화와 개방이 갖고 올 에너지자원 수급문제와 환경악화 요인이다.

만일 중국의 에너지소비가 현재 추세대로 증가하면서 1인당 소득이
한국수준 또는 대만수준이 된다고 가정하면 중국의 에너지소비량은
전아시아와 유럽의 에너지소비량을 합친것 보다도 많아진다. (1992년기준
중국의 1인당 에너지소비량은 0.59toe 총에너지 소비량은 6억8,000만toe
이고 한국과 대만의 1인당 소비량은 2.66toe와 2.72toe이다. 1992년 현재
아시아 전체 에너지소비량은 1,855백만toe이고 유럽은 1,407백만toe이고
미국은 1,960백만toe이다) 또한 전세계,특히 미국측이 신규원자력발전계획을
사실상 포기한 상태인데 비해 세계에서 최고의 과밀인구집중지역인 한국
일본 중국 대만만이 2010년까지 현재 가동중인 70개와 같은 70개의 신규
원전을 계획중이거나 건설중에 있다.

북한의 핵개발이 세계적 군축과 탈냉전의 세계추세에 역행하듯이 아시아
인구과밀지역의 집중적인 원전건설은 사전 사후문제관리에 대한,그리고
폐기물처리에까지 충분한 안전장치의 강구없이 추진할 경우 새로운
재앙일수 있다.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은 80년대말 외국기자와의 회견에서 만일 서방측이
중국의 경제개발을 지원하지 않으면 1억2,000만명의 보트피플이 태평양을
떠다니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중국이 경제성장을 해도 경제성장을
못해도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한국은 바로 이러한 인류공동의 문제군들을 한꺼번에 안고있는
세계적문제의 핵심이자 실험관이 되었다.

한국이 어떻게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이땅의 물과 산과 공기와 바다와
자원과 에너지와 핵과 군사분규와 도시과밀과 경제성장과 세대전쟁과
노령화와 복지를 관리하여 다른 문화.문명공동체와의 관계를 평화롭게
꾸려 갈 것인가.

이 인류의 문제,지구사회공동체의 문제는 가지려고 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주려고 하는데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인류공동체인 남에게 줄것을 마련하고 실제로 주어야 한다.

한국은 1996년 OECD가입을 결정했다. 그 의무조항중의 하나로 후진국원조
조항이 있다. GNP의 1%를 목표로 그중 무상원조와 공공차관(ODA)0.7%,민간
상업차관 0. 3%를 기준으로 하고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목표와 기준을 지키고 있는 나라는 스웨덴 뿐이다.
잠정적으로 ODA 0. 4%가 기준으로 되어있는 셈이다. 현재 우리의 ODA는
0. 06%에 불과하다. 우리는 "세계적 공동체" 지구사회의 주동자가 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빠른시일내,예를들면 2000년까지 ODA를 GNP의 0. 5%까지
올리는등 액수에도 충실해야 한다. 뿐만아니라 그내용에서 세계공동체의
중심국가다운 안목과 뜨거운 가슴이 반영되어야 하고 프로젝트결정에
치밀한 전략과 정열이 필요하다.

북한과의 통일비용도 이런 세계공동체적 측면에서 검토해 볼만하다.

한국의 조건이야 말로 세계 어느나라 어느 민족보다도 더 평화적이기를
요구하고 세계의존적이다. 에너지 자원 무역의 해외의존도,지정학적특성,
도시과밀과 교통 환경조건,핵과 군사조건,인구와 공간조건,땅과 바다와
하늘의 조건 그 모두는 우리가 범인류적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의식과 행동
규범을 창조하고 실천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또 한국의 역사상 이웃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서
아시아.태평양에서 평화에 대한 정당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갖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거기에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대륙과 해양의 접촉점이요,하버드대 새뮤엘
헌팅턴교수의 "문명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가설에 의하면
문명끼리 부딪치는 "단치"(Fault)지역에 속한다. 우리가 이런 지리적
문명적 조건에서 생존과 평화에 충실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관련되는
대륙문화와 해양문화,대륙세력과 해양세력,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을 모두
포용하거나 모두를 초월할수 있는 보편적 가치 비전 철학 계획 정책을
창조하는 수 밖에 없다.

한국의 굴절많은 경험과 삶의 조건 그리고 샤머니즘 불교 유교 기독교
까지를 흡수하는 강한 소화력은 우리가 우리조건에 충실하면 반드시
인류 지구사회가 요구하는 새 가치규범을 창조할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공동체와 세계공동체를 연대하고 한국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결속하고 한민족의 생존과 인류의 생존을 융화하려한다면 우리는 4대강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세력균형상의 불리가 유리로 전환되고 반도로서의 단층
이 접합점으로 변전되고 굴절많은 경험은 다문화흡수의 무대가 되고 가장
많은 인류문제군을 껴안고 있는 우리의 고민은 세계 보편적 체제 발명의
모체가 될것이다.

이러한 전환수렴은 자유와 동시에 자기 행위의 남(인간 사회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자발적억제,지구적 공유물과 공공재
관리에 대한 자율적 공헌,수직적편리보다 수평적문제에 대한 책임감
같은 개인및 집단자원의 변화를 요구한다.

한국의 조건과 한국의 경험 그리고 한국의 가능성은 한국이 세계평화의
중요한 원천의 하나가 될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스위스의 전쟁 비극의 체험이 세계 적십자운동을 창조했고 스웨덴의
농업시대의 가난이 공업시대들어 노벨상으로 승화했고 일본은 미국이
내린 히로시마원폭과 맥아더헌법으로 평화국가로 변신했다.

한국은 그 비극과 가난과 전쟁과 환경과 지정학.지경학의 조건이 분명
스위스보다 스웨덴보다 일본보다 더 차원높고 더 깊고 더 선명한 평화의
철학과 비전과 상징과 정책을 잉태하고 있다.

나와 이웃과 나라와 인류의 지구공동체를 일치시키는 노력을 충직하게
하면 반드시 한국이 새 지구사회의 가치규범으로서 평화의 철학과 상징과
정책의 발신지가 될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진정 민족주의에 충실할수록 세계주의
지구사회에 가까워지고 세계주의 지구사회의 문제를 충실히 해결하고자
하면 그럴수록 한국의 조건해결에,즉 한국민족주의에 친근해질 것이다.

한국과 한민족은 보통의 나라 보통의 겨레 보통의 시민으로서는 생존과
평화가 불가능하다. 한국이 보통의 나라로 산다함은 현재는 4강에,그리고
근대이전에는 대륙과 해양세력의 고전적충돌에서 편들거나 사대주의로
생명을 부지했던 그 제도 그 관행을 탈냉전과 더불어 중국과 일본이라는
고전적세력 배치로 역사가 환원됨에 다시 그 비극을 되풀이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밀도높고 충실하고 비상한 차원의 가슴과 머리와 손 발
로써만 생존의 운명이 개척되고 평화를 선택할수 있는 그런 나라 그런
사람들의 비상한 공동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