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미군 용역사업을 하면서 10년동안 사귄 큰 수송계통 장교들이
월남사업에 많은 도움을 줬다. 미군의 주한근무는 1년 주기로 교체됐기
때문에 10년의 세월동안 대략 3천명에 가까운 미군장병들과 지면이 있게된
셈이었다. 그들의 고된 해외생활에 여러가지 편의를 봐주고 인간적 유대를
쌓은 것이 무형의 자산이었다.

그들의 뇌리속에 남아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일에서든 신용을 지키던 젊은
사업가였고 우리 말로 궁상을 떨지않고 당당하게 벤츠를 타고 다니며 계약
당사자로서의 면모를 지키던 한국 기업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나의 집에까지 초대를 받았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부암동 자택에서 풀코스의 음식을 대접하면서도 사업얘기는 꺼내지 않아
통큰 경영자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어떤 이권이 걸려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이임
할때 집으로 초청해 파티를 열었다. 손수 마련한 선물도 잊지 않았던,멋을
아는 한국인으로서의 인상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편견이 심해서 "길"하면 "먼지투성이"요,
"집"하면 "판자집"을 떠올리던 시절이었다. 의정부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서울에 올때는 마스크까지 쓰고 다녔다. 그런 그들에게 이러한 파티는
한국에 대한 시각을 고쳐주는 기회도 됐다.

이러한 친분과 우정을 바탕으로 월남의 미군관계자들에게 한국기업이
참여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고 퀴논항에서의 작업과 관련해 나름대로
구상한 사업계획도 설명했다.

나의 신용에 대해서는 이미 펜타곤에서도 알고 있던 터였다. 한진에 대한
미국측의 신용조사를 간단히 거친뒤 마침내 단독으로 초청받는 형식으로
수의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본계약 서명에 앞서 선행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계약이행을
위한 쌍방 보증금으로 3백만달러를 걸고 3개월안에 소요되는 모든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쌍방보증금이란 내가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또는 미군측이 작전상 불필요할 경우 서로 상대방에게 변상키로
약속한 금액이다.

어느정도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귀국해 준비작업에 들어갔으나 필요한
자금과 장비를 마련할 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간부직원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무모한 일이라며 만류가 극심했다.
그러나 사업에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터였다. 그것은 운과는
다른 것으로 매일 남들이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포착해야 한다.
한진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월남에 진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아무리 좋은 구상이 있더라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면 헛된 일이라는 결심
으로 추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모든 지혜를 다 모아 자금과 장비 마련에 나섰다. 정부로부터 지불보증을
받아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도 했고 그래도 부족한 일부는 명동 사채시장의
연수표를 이용하기도 했다.

장비마련 문제는 평소 특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해왔던 일본의 한 인사가
1백60만달러 상당의 장비를 직접 주문 제작해 줌으로써 해결됐다. 이것은
아무런 담보도 없이 말 한마디로 성사되었는데, 평소의 신용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서울
사채시장에서 융통해 3개월후 1백50만달러를 우선 갚았다. 이때는 월남
에서의 계약 사실일 알려져 있던 터라 사채금리를 내려줄테니 더 써달라는
요청까지 있었다.

계약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장기영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정부차원의 측면 지원을 요청했다. 2월초 동남아를 순방하고 있던 고
박대통령을 대만에서 만나 계약에 필요한 지불보증을 요청해 허락을
얻었다. 큰 격려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드디어 66년3월10일 주월 미군사령부에서 한미 두나라의 국기를 앞에 하고
군수담당 부사령관 앵글러중장과 계약서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나로서는 감격 그 자체였다. 남들이 가능하리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집념 하나로 해낸 것이었다. 자금과 장비를 마련하는 동안 노심초사
했던 그 어려웠던 고비가 생각났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것,무에서 유를
창조함과 다를바 없었던 것이었다. 오직 한가지 있었다면 그동안 쌓아온
신용과 이를 바탕으로 맺어진 인간관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