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전쟁은 멀리 떨어져서 보라"는 영국속담이 있다. 그러나 전쟁과
관련된 사업을 하다보면 전쟁터에도 가리지 않고 뛰어 들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내게 있어서 월남전이 그랬다.

수송활동은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하면서부터 생겨났다. 그 수단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단축은 인간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필요한 것으로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나 수송산업은 인체에서
혈관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온 것이다.

내가 월남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것은 전쟁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 1958년
동남아를 둘러보는 기회에 월남에 들렀을 때 부터였다.

64년 여름 경제협력 자금을 들여오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가 월남상황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은 뒤 부터는 점점 사업적인 관심이 생겨 자연히
그 추이를 지켜보았던 터였다. 그해 10월 한.월양국간 월남지원을 위한
국군파병에 관한 협정이 체결됐다.

이듬해인 65년 1월 많은 논란끝에 "국군월남파병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비전투병력 2천명을 파병키로 한것이었다. 파월장병들이 부산항을 떠날때
부르던 이미자의 "황포돛대"의 가락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3월이 되자 마침내 미군이 월맹에 폭격을 개시하고 전쟁은 점점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들었다. 한국의 전투병력 파견도 뒤따를 것으로 예상됐다.

월남전이 확대되자 미국은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 있었다. 내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65년 여름이었다.

월남에서의 사업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미국방부와 직접부딪쳐 보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판단해서였다.

전략물자의 신속 정확한 수송을 필요로 하는 전쟁터에서 사업의 여지가
적잖을 것이라는 직감도 있었다.

서울에서 경복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장남 량호(현 대한항공사장)를
미국에 유학시키기 위해 함께 데리고 갔다.

희망하는 전공을 고려하고 어릴때부터 국제적인 감각을 기른다는 의미에서
미국에 살고 있던 여동생이 권유를 해온 터였다. 여비를 아끼기위해서
일반여객기가 아닌 전세화물기를 이용했다.

한달가량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나는 펜타곤의 고위 장성들중에는 한국
근무시절에 교분을 쌓은 수송분야 장교출신들이 의외로 많음을 알게됐다.

부암동에서의 송별파티가 단순한 미국인들에게 호감을 주었음을 새삼
느꼈다. 또 그렇게 지면이 있던 고위장성들은 진심으로 반가워 하며
따뜻하게 환영해주었다.

미군장성들은 이것저것 상의를 구하는 나에게 온갖 조언을 아끼지않았고
나는 더욱 사업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됐다.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그해 12월 정부요청에 의해 한국용역군납조합이사장
자격으로 경제시찰단을 구성해 동남아 순방에 나섰다. 이것은 장기영씨의
아이디어였는데 우리가 파병을 하니까 기업인들이 외화획득의 기회를 잡아
보도록한 신선한 발상과 배려였다. 추진력과 박력이 뛰어난 분 이었다.

이때 군수물자가 체화돼 만재상태에 이른 월남항구를 둘러보고 한진이
국내에서 쌓은 경험과 기술이라면 이곳에서 반드시 성공할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됐다.

퀴논의 외항에는 40~50척의 화물선이 정박중이었으나 내항시설이 빈약
한데다 하역능력의 결여로 물자유통에 애로를 겪고있어 군수지원도 큰
장애를 빚고 있었다.

나는 이때 사이공보다 퀴논을 월남진출의 발판으로 삼기로 마음을 굳혔다.
안전에 대한 위험이 큰 사이공 일대에 비해 퀴논에는 우리의 맹호부대가
가까이 있어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또 인재들이 많이 모이는 수도보다는
경쟁의 정도가 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남 어디서든 내게 신용을 주도록 당부하는 펜타곤의 추천도 있어서였
던지 마음 든든했다. 이제 진출교섭 활동의 영역을 펜타곤에서 현장인
월남으로 옮길 때라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