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명예퇴직 대상입니다". 지난해 고참 은행원들은 이런 말을
자주 했었다. 자리가 불안해졌다는 간접적인 표현이다. 올해는 30대
중반의 일반행원들까지 비슷한 소리를 한다. 부장이나 지점장급만을 대상
으로하던 명예퇴직을 일반직원에게까지 확대한 은행이 늘어나서이다.

명예퇴직제도는 경영합리화를 위한 은행들의 고육지책이다. 그러나
명예퇴직이 활성화되면서 가장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은행원의 이미지가
서서히 깨지고있는것도 사실이다.

김모씨(37.여)는 지금은 두 아이를 가진 평범한 가정주부이다. 그러나
지난 1월만해도 어엿한 은행원이었다. 지난달 은행을 그만둘때까지 꼭
20년동안 가정주부보다는 은행원이 그에게 더 어울리는 타이틀이었다.
그동안 이 타이틀을 고수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기혼자라는 눈에
보이지않는 "박해"도 참아야했다. 남녀차별도 감수해야했다. 그러던 그
에게 퇴직을 결심케한 계기는 "직급별명예퇴직제도"의 실시. 아이들
뒷바라지 문제도 있고 남편의 성화도 있던차에 정년때까지의 보수를 계산해
준다는 "명예퇴직"은 김씨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김씨가 퇴직후
받은 퇴직금은 정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1억원을 웃돌았다고한다. 퇴직당시
의 정상적인 퇴직금 6천여만원에 명예퇴직금이 보태져서이다.

상업은행의 박모씨(55)는 지난해 태어나서 가장 큰 비애를 느꼈다고 한다.
30년 가까이되는 은행생활동안 비록 남들보다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뱅커"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그였다. 은행원의 꽃이라는
지점장도 몇군데 지냈다. 비록 본점부장이나 임원자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지만 명예롭게 정년을 맞이하고 싶다는게 그의 희망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난데없이 은행장직인이 찍힌 공문 한장이 날아들었다. "올해부터
실시하는 명예퇴직의 대상입니다. 0일까지 신청하시면 정년까지 근무한 것
으로 계산해 드립니다"는 요지였다. 한마디로 "남은 봉급을 다 줄테니 은행
을 위해 일찍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약간은 섭섭하긴했어도 못받아들일
이유도 없다는게 박씨의 처음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나 명예가
아니었다. 바로 장남의 혼기가 꽉 찼던것. 사돈이 될 댁에서 "아버지의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때 은행원인 것과 무직인 것은 천지차이일 것은 뻔한
일이었다. 장남의 혼사를 치르고 그만둬도 그만둬야겠다느게 박씨의 판단
이었다. 그래서 "제발 좀 나가달라"는 듯한 윗사람의 눈총을 애써 외면했다
고한다.

지난해 중소기업은행에서 지점장을 지냈던 고모씨(53). 그는 명예퇴직이란
제도가 있었던 것을 아주 다행으로 여기고있다. 정년은 58세이지만 55세만
되면 대개 후선으로 물러나는게 모든 은행의 관행이다. 은행에서 정년퇴직
을 한다해도 뭔가 하지않으면 안된다는게 고씨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친구로부터 동업제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고씨는 연말에 실시된 명예퇴직의
길을 기꺼이 택했다. 은행에게도 좋고 자신에게도 정상적인 퇴직금보다 2배
가까이나 되는 명예퇴직금이 유용했다고한다.

명예퇴직은 말그대로 정년이전에 퇴직하는 사람에게 "명예"를 얹어주는
제도이다. 명예의 수단은 물론 돈이다. 은행들은 퇴직당시의 기준퇴직금
에다 정년때까지의 봉급중 일정분은 더해 더해 일시불로 준다. 해마다 5%
수준의 임금인상률까지 계산해서이다. 그러다보니 대개의 경우 명예퇴직금
은 정상적인 퇴직금보다 2배이상(1급의 경우 2억원안팎)에 달한다. 은행
으로서는 비록 일시에 목돈을 지출해야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비대한 군살을
빼는데는 더없이 좋다. 희망자로선 거금을 일시불로 손에 쥘수있어 "제2의
인생을" 살기에 적합하다. 한마디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식이다.

따라서 은행들이 앞다투어 명예퇴직제를 도입하고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
하다. 지난 92년 조흥은행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은행이 명예퇴직을 실시,
지난해만 1천여명이 조기퇴직했다. 올부터는 1,2급(부.차장급)뿐만 아니라
일반행원이나 별정직에까지 명예퇴직제도를 확대하고있다. 지난1월 상업
은행과 한일은행은 각각 1백28명과 2백37명을 명예퇴직시켰다. 이중 일반
행원인 5급이하직원이 전체의 73. 2%인 2백67명에 달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명예퇴직이 문제가 없는것은 아니다. 몇몇 은행의 경우 감량경영에
대한 지나친 의욕이 앞서다보니 대상자에게 퇴직을 종용,명예퇴직이 아니라
"강제퇴직"이라는 지적도 나오고있다. 또 명예퇴직에 응하지않는 사람은
은행이 임의적으로 강제휴가를 보내고있다는 불만도 들린다. 개방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은행의 군살빼기는 필수적이다. 또 은행에서 더 이상 희망
이 없는 직원으로서도 그리 나쁜 제도만은 아니다. 이과정에서 평생 안정된
직장이라는 은행원만의 장점이 서서히 퇴색하고있다.

<하영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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