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출입은행장 시절 당시 장영자사건은 은행들의 두가지 나쁜
관습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즉 대출선으로부터 백지어음을 몇장씩
강제징수하는,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횡포와 남의 은행예금을 대출과
연계시켜 뺏고 뺏기는 과당경쟁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은행부터 백지어음 강제징수를 못하게 하고 받은것은 즉시
돌려보내도록 했다.

장영자씨가 20억원을 빌려주고 백지어음을 2~3장씩 은행관습대로
강요해서 받아 그것을 은행에서 할인, 자금을 조성하며 다시 거액
예금을 해주고 또한장의 백지어음으로 대출받는 수법으로 거액의
자금을 조성해서 많은 금융인이 상처를 입도록 했던것이다.

83년에는 국제금융계에서 세계 4위의 부채국인 한국을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브라질을 필두로 멕시코 아르헨티나등 여러나라가
줄지어 국가부도를 냈기때문이다.

수출입은행이 은행차관을 교섭했더니 참가하지 않겠다는 은행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은 남미국가들과는 달리 외채
상환에 문제가 없는 나라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한국의 경제
현황"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선 첫째 한국은 수출액이
아르헨티나의 3배에 달하고, 둘째 남미 각국은 수입자유화로 소비재
수입때문에 빚을 많이 졌으나 한국은 기계수입때문에 빚을 진것이므로
수입한 기계로 생산한 제품을 수출해서 빚갚을 돈을 벌고있으며 셋째
대외부채총액은 4백억달러이지만 수출입은행의 연불수출어음과 상업
은행들이 갖고있는 해외채권, 그리고 총외화 보유액 등을 합한 외화
자산은 70억달러에 달해 우리나라의 순외채는 3백30억달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자료는 우리나라 은행차관도입에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83년9월8일 나는 5개국 정상회의 비공식대표단의 일원으로 버마 랭군에
도착했고 9월9일에는 아웅산 참변을 목격했다.

당시 공식대표단으로 버마를 방문했던 유능한 관료들이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어 귀국비행기의 일등석이 텅비었던 기억은 평생잊지 못할
것이다. "공식대표"와 "비공식대표"라는 말하나 차이가 생사의 갈림길이
된것이었다. 내옆에 앉은 신병현전부총리는 살아남고 나와 격의없던
서석준부총리는 운명을 달리했다.

나는 평소 후진국은 수입대체 국산화한 제품이 새수출품이 되도록
해야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선박기자재 국산화를 추진
키로 하고 우선 쌍용중공업이 만들고 있는 5천마력내외 중형엔진의
수출산업화부터 시작했다.

쌍용중공업이 만들고 있는 엔진을 외국메이커가 덤핑하고 있어 수출
선박에 탑재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금진호상공부차관과 합의해서
국산엔진을 탑재하는 조건을 붙여 연불선박 건조자금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 결과 쌍용은 수출용선박 한척에 평균 5개의 엔진을 탑재할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수출까지 하게된 것이다.

내가 수출입은행장에 부임하자 여의도에 새건물공사가 착공되어 땅을
파고 있었다. 나는 즉시 외벽이 수입석으로 설계된 것을 국산 화강석
으로 바꾸어 국내석재개발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국산대체로 생긴
여유자금으로는 연수원과 운동장을 만들었다. 이것이 직원들에겐 더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85년12월 수출입은행 해외채권발행을 위한 기관투자가 설득 세미나를
스위스의 각도시에서 개최하기 위해 취리히를 거쳐 제네바에 도착했다.
거기서 청와대로부터 즉시 귀국하라는 연락을 받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