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지하 만인지상". 흔히들 국무총리를 이렇게 부른다. 대통령을
빼놓고는 가장 높은 사람이란 뜻이다. 이 말이 딱 들어맞는 자리가
은행의 전무(부행장)이다. 대형은행의 경우 직원수는 1만여명. 정확히
은행장1명보다 낮고 1만여명의 직원보다 높다. 어느 조직에서나 마찬가지
로 "2인자"라는 자리는 양면성을 가지고있다. 은행장의 뒤를 이을 첫번째
후계자이면서도 은행장의 잠재적 라이벌로 존재한다. 전무와 행장간의
알력이 불거지는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실명제를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때를 보이겠다" 장영자씨
부도파문으로 세상이 온통 시끄럽던 지난주, 홍재형재무부장관이 한
말이다. 홍장관의 이런 발언이 나왔던 그날 오후. 문제가 된 은행의
전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결국은 은행장이 책임을 져야하는것
아닙니까". 물론 자신이나 은행장의 목에 비수가 겨눠줘있는 상황을
묘사한 얘기임에 틀림없다. 또 홍장관 발언의 의미를 가늠하는 말일
수도있다. 그러나 듣기에 따라선 묘한 감을 주고있는것도 부인할수 없다.
"은행장이 물러나기만한다면 다음 차례는 자기다"라는 속내를 내비친
것이라는 자의적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무라는 자리가 이렇다. 제2인자로서 마지막 남은 자리가 은행장뿐이다.
다행히 임기가 은행장과 같아 "대권이양"가능성이 엿보인다면 걱정할게
별로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경우 얘기는 달라진다. 지난80년대중반
J은행에서 있었던 일화다. 초임임기를 앞둔 당시 행장은 연임을 강력히
희망했다. 그래서 튼튼한 "줄"도 마련했다. 자기사람을 조직의 요직에
심어논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당시 전무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고한다.
"행장은 큰 거래처인 모대기업그룹의 자금사정이 어렵자 전무에게 "살리라"
고 지시했습니다. 전무는 한마디로 "노"였죠. 결국 그 그룹은 일반대출을
쓰지 못하고 금리가 연19%에 달하는 타입대로 메꿔야했죠. 전무의 전결사항
인데다 높은 금리로 돈을 벌어오는데 행장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한 측근의 말이다. 결국 이 대결은 전무의 판정승으로 끝났
고 행장이 된 그 전무는 은행발전의 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이렇듯 전무와 행장은 어쩌면 잠재적 라이벌 관계이다. 지난해 사정바람이
거셌을때 "행장이 물러나면 바로 그옆방(전무실)에선 소리없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는 말이 은행원사이에서 유행했을 정도이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주총전해 10월께부터는 본점3급(과장)이상 직원들은 일을 놓았다고한다.
힘의 구도를 잘 파악해 줄을 서야했기 때문이다. 어떤 은행에서는 주요부서
차.과장급으로 미리 전무의 "새도우캐비넷(Shadow Cabinet)"까지 만들어지기
도했다고한다.

그러나 속내야 어떻든 전무는 행장앞에서 "죽었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떡하든 자리를 보전해야만 후일을 기약할수 있다. 이런
현상은 국책은행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부행장시절이었죠. 당시 행장이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맨 아래층까지
달려 내려갔어요. 그리곤 행장이 탄 차가 길모퉁이를 돌아갈때까지 머리를
90도로 숙이고있었죠. 행장이 보던말던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은행장까지 올랐다가 지금은 은퇴한 한 국책은행장의 말이다.

지난해4월 중소기업은행에선 부행장을 중심으로 합종연횡이 이뤄졌었다.
당시 이용성행장이 은행감독원장으로 옮겨가자 은인자중하던 부행장이
"내부행장배출"이란 행내여론을 업고 행장도전의사를 보인것. 그러나
대주주인 정부의 움직임을 이내 간파하고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갔다고한다.

올해 임기를 맞는 전무급은 줄잡아 12명. 신광식제일은행전무 정창순,
이관우 한일은행전무 장만화 서울신탁은행전무 김진만 한미은행전무등이
그들이다. 또 사퇴한 송한청전동화은행전무자리도 공석이다. 이중엔
차기 행장감으로 거론되는 인물도 있고 이제 할만큼 했으니 물러나야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연임을 고수하고있다. 더욱이 임기를
맞는 감사와 수석상무들까지 전무자리를 공공연히 노리고있어 어느 은행에서
나 전무자리를 둘러싼 세력다툼이 치열하다.

물론 철들고나서 평생을 은행원으로 보낸 이들로선 그냥 물러나는게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욕심이 있다고 다 행장이 될수는 없는 노릇
이다. 자질도 중요하고 도덕성도 필수적이다. 사심을 버릴때 은행장도
될수있고 은행발전도 꾀할 수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기위해선 전무를
선임할때부터 정실과 인연에 얽매이지않는 은행장의 변별력이 필수적임은
중론이다.

<하영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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