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미국의 클린턴대통령은 취임후 첫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의원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한 그의 연설은 그러나 미사여구가 거의 없었다.
강대국의 대통령답지않게 거창한 문제들의 제기도 눈에 띄지 않았다.
경제재생 의료제도개혁 교육문제등 내정을 중심으로 지극히 실무적 정책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정책상품의 과대포장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알맹이를 제시한 것이다. 그 솔직함이 미국민들의 호감을 얻었다.

미국얘기를 꺼낸 것은 클린턴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거창한
것을 너무 좋아한다는 점을 비유하기 위해서다. 한국의 신문들은 제목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 자연히 본문의 비율은 가장 낮다. 한마디로 모양만
요란했지 실속은 부실한것이다. 이는 언론에 대한 얘기지만 이것이 국가를
경영하는 정책에까지 이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지난주에 마감된 올해 각부처의 업무보고 내용에서도 크게 보이기 경쟁은
여실히 드러났다. 한탕주의처럼 예산의 뒷받침이 없는 전시정책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는가 하면 각부처의 정책이 서로 충돌되는 것도 있어
배가 바다로 가는건지 산으로 가는건지 어리둥절하게 된다.
수도권과밀억제대책이 있는가 하면 수도권개발유도정책도 나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하게 만든다. 경쟁력강화를 위해 기업들에
저리 해외자금조달확대를 허용하겠다고 한 부처가 발표한데 이어 다른
부처에선 통화팽창을 우려하여 외자유입을 억제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부처끼리 "OK목장의 결투"라도 벌이자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수 없다.
보도에 의하면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경제가 성공하려면 경제팀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그렇다면 우리는
경제가 실패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수 없다. 더구나
각부처의 대형 사업계획은 예산의 뒷받침이 없으면 공수표에 불과하게
되는데 국민에 대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눈가림하려는 것은 한심하다.
우리의 각종정책은 명분만 중시하여 뻥튀기식으로 발표해 놓고는 그것을
실현할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작업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못박고
재목다듬는 얘기는 하지 않고 큰집짓겠다고만 자랑한다. 각종 정책은
현실에 뿌리박아야 실현되는 것인데 이를 무시하기 일쑤다. 꾸준한 향상이
이뤄지지 못하고 똑같은 대형사고가 재발하는 것도 이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치밀한 국가의 구상력을 지니지 못한채 사상루각에
집착하고 있는 셈이다.
장영자씨 금융사고 처리에 있어서도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가리기도 전에
은행장과 임원들의 사퇴로 일을 매듭지으려는것 같은 인상이다. 문제의
해결보다는 민심을 잠재우는 것이 항상 우선이다. 이런것들이 우리를
사고다발사회로 만들고 있다.
4년전 사회를 벌집쑤셔놓은듯 요동치게 했던 우지라면사건은 벌금을
안내도 되는 선고유예와 집행유예등으로 결말이 났다. 부산열차참사사건의
건설회사사장은 무죄가 되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당시 우리가 난리가
난듯 법석만 떨었지 책임소재나 문제점을 분명히 가리려는 노력을 했는지
의심스럽다. 일종의 국민적 우행을 되돌아 보는 느낌이다.
우리는 문제를 심화시키지 못하고 겉치레로만 대강 끝내는 습성이 있다.
작은 것은 시시하다고 보지 않고 큰것만 대충 훑어보고 넘어가는 것이다.
이래서 모든 일이 부실해지고 사회가 단단하지 못하다. 국가경영의
정책까지도 이모양이라면 엔진을 아무리 가속해도 바퀴가 공중에 떠있어
주행하지 못하는 자동차꼴이 된다. 갈길이 먼 선진화에의 목표에 언제
도달할수 있을지 감감하다.
올해 각부처업무보고에 이와같은 우리사회의 병폐가 집약된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김영삼대통령은 각부처의 업무보고추진상황을
6~7월께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이제부터라도 각부처는 실천가능한
과제들을 선별하고 정책의 정합성을 살리면서 실무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발표자체로서 할일을 끝냈다는 망각증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낙동강오염사건이 터지니까 우루과이라운드대책이 흔적도 없어지고
장여인사건이 터지니까 물대책이 소멸해버리는 식으로 업무보고 내용이
함흥차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자면 큰것만 챙기지 말고 작은 일부터
성실히 하는 관행을 만들어야 한다. 작은 것이 쌓여서 큰것이 되는 것인데
큰것만 보려고 하면 아무일도 이룰수 없다. 기초부터 다져야 국가가
튼튼해질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